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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와 까치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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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일 전, 몇 년 만에 아내의 머리 모양이 달라졌다.
그 날 나는 예전처럼 사업이 잘 나가던 시절의 내가 아닌 본능에서 발사된 빛의 속도로 달라진 머리 모양에 대해서 말했다. “이현세 만화 알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아내가 말했다. “엄지 같다고?” 순간 연애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내가 머리 손질만 하면 나는 엄지 같다고 말해왔었다. 엄지가 이쁘긴 이뻤나 보다. 그런데 아내는 한 번도 나를 까치 같다고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오늘 아침 꽃알레르기로 꽉 막힌 코를 연신 풀어 제끼며 골골대고 있다가 주섬주섬 옷을 입으며 지친 심신을 달래는데 아내가 느닷없이 베란다 창문을 슥 열더니 혼잣말처럼 말한다. “어디서 잘 생긴 까치가 우네?”

박승용 작성

2013년 5월 24일, 7: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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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데니얼 데닛의 "생각을 위한 직관펌프 및 다른 도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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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서 퍼옴: NewsPeppermint:

다음은 데니얼 데닛의 신작 "직관 펌프(intuition Pump)"에 소개된 생각을 위한 7가지 도구입니다.

1. 자신의 실패를 이용하라:

"그때는 이게 좋은 아이디어인 줄 알았는데!"이런 후회의 말은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할 때, 우리는 이것이 인간이 가진 지혜의 산물임을 알아야 합니다.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생각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패에 이르게 된 원인을 잘 살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당신은 더 큰 기회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더 보기… 8단어 남음

박승용 작성

2013년 5월 22일, 7: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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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것은 쉬워하는 것과 같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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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논어) 雍也篇(옹야편)에서 공자는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낙지자) 즉, 알아가는 것은 좋아하는 것과 같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과 같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이 樂之者(낙지자)만 돼면 뭐가 돼도 될 것 같은데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개념같아서 헷갈립니다. 그러다 문득 대입합격자발표만 나면 등장하던 단골 인터뷰 내용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자다 말고 일어나 메모하기를,

樂之者 不如易之者(즐기는 것은 쉬워하는 것과 같지 못하다).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넘, 점수로 출세하고
싸움이 제일 쉬웠다는 넘, 구라로 출세하고
암산이 제일 쉬웠다는 넘, 장사로 출세하네.

의왕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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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도서관에서 동쪽을 향하여 앉으면 멀리 광교산과 백운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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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따가울 정도인 오전에 이미 중천인 태양의 흑점이 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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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개 월을 산 지금도 나는 모른다. 생명의 본질을, 삶의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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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용 작성

2013년 5월 21일, 10: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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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무선 시대의 노래 한 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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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무선 시대의 노래 한 소절

날줄과 씨줄은 그 형태로 인하여 날줄은 근본, 부모, 바탕 등으로, 씨줄은 행동, 자식, 구조물 등으로 비유됐습니다. 그 작동 원리로 인하여 인연, 삶, 지혜 등의 원리에 비유됐구요.

이 비유가 계속 생명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결국 모든 게 날줄과 씨줄의 원리더라는 것입니다. 명사들의 말씀과 글에 흔히 인용되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죠. 음식점 메뉴판에도, 백화점 매대에도, 도로 교통에도, 사회와 국가, 세계의 질서에도 들어가 있네요. 세상에 태어나와 탯줄을 끊고 씨줄이 돼서 날줄을 수억 번 가로질러봐야 철이 든다 하겠어요.

유선의 시대에서 무선의 시대로 발전해도 유선을 버린 게 아니고 유선을 날줄 삼아 무선이라는 씨줄로 사업이 영위되는 것을 알아야 완성된 사업을 하는 거겠습니다.

박승용 작성

2013년 5월 20일, 2: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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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설 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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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威儀寂靜分 第二十九
須菩提야 若有人이 言하되 如來-若來若去若坐若臥라하면 是人은 不解我所說義니 何以故
오 如來者는 無所從來며 亦無所去일세 故名如來니라.

原文解釋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만약 오다거나 간다거나 앉았다거나 눕는다거나」한다 하면 이 사
람은 내가 말한 바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왜 그러냐 하면 여래는 어디로부터 온바가 없으며 또한 어디로 가는
것도 없으니 그러므로 여래라 이름하는 때문이니라.』

科解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팔상성도(八相成道)을 나투시고 열반해 보이시고 하는 것은 다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
해서 만행만덕(萬行萬德)을 지으신 복덕의 보응으로 응화신(應化身)을 나타내시어 베푸신 자비연극입니다. 위의적정분
(威儀寂靜分)이란 말은 거래좌와(去來坐臥)의 네 위의가 다 공하여서 공적한 가운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허깨비 놀음
을 보인 것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여래의 법신인 마음자리에는 오고가고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룸비니 꽃동산에 강탄하신 것을 오셨다(若來)하고 사라수 수풀에서 열반해 보이신 것을 가셨다(若去)하는데, 부처님은
오셔도 온 게 아니고 가셔도 간 게 아니며 그렇게 오셔서 오신 것도 가신 것도 아니란 뜻으로 위위적정분이라 한 것이
니, 위의(威儀)라 함은 육신의 거동 . 행주좌와(行住坐臥) . 어묵동정(語默動靜)의 일체를 가리킵니다.

設義
현상계의 모든 것이 환인줄을 확실히 알면 현실에 구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통조화를 부리게 되지만 그런 걸 모르
는 사람은 제 마음으로 주위 환경을 만들어 가지고 구속이 되고 속는데 사실은 속는 것도 아닙니다. 밥 먹고 물 긷고
산에 가서 나무하고 장사하고 농사짓고 하는 것이 모두 신통묘유(神通妙有)입니다.
그러므로 있다 하면 용(用)이고 없다 하면 체(體)이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 하면 체와 용을 초월한 것이며,
「이렇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그런 것을 체와 용이라 이름 할 뿐이다.」하면 체와 용을 겸한 것이 되는데 이것이
불교의 사구(四句)가 됩니다. 이것을 현상계의 삼라만상은 있는 것이 공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는 소견을 제일구(句)의
유문(有門)이라 하고,모든 것은 그 근본을 자세히 따지고 보면 닜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공이라고 보는 것을
제 이구의 공문(空門)이라 하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면 제 삼구인 역유역공문(亦有亦空門)이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 제사구의 비유비공문(非有非空門)이라 그럽니다.
니쁘다고 보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은 반드시 좋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데 또 한 사람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
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반합(正反合)의 서양 논리로는 이렇게 긍정 부정해서 그 양자를 종합해서 진보하는 정반합의
법칙으로 끝나지만 불교에서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이론이 다 끝난
것 같지만 하나 더해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래야 마지막 이론이 끝납니다. 그러니 이것으로 보더라도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보다 불교의 사구논법이 훨씬 완전한 논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문학이나 자연과학이나 모든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도 이 사구의 이론으로 하면 더욱 완전하게 더욱 빨리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서 활용하기를 바랍
니다.
그런데 이 사구에 사구백비(四句百非)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까지가 아니다, 곧 온갖 것 온갖 이치를 다 부정하여 어떠
한 존재나 이론 . 원리 무엇이든지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백비라 한 것이고 사구 자체에 이미 백 가지로 부정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뜻으로 사구백비라 한 것입니다. 사구로 네 번 부정하는 것만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어서 백비란
말을 붙였지만 사실은 사구 가운데 이미 백비의 원리가 다 들어있는데 그 뜻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풀이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처음에 있다 하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부정으로 봐서 제일비(非)가 되고 다음에 없다 하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
란 <제이비>입니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제삼비>가 되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말은 <제사비>
가 됩니다. 그런데 또 중생들이 이 사구의 논법에 집착해서 사구의 본래 뜻을 바로 깨달을 줄은 모르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그것만을 주장하니까 그런 주장을 부정하는 제 오비가 나오게 됩니다, 마치 아인쉬타인이 물질의 본
질은 에네르기도 아니라고 했듯이 물질의 본질을 원소라고 하지만 원소의 근본체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 연구돼야 하고
원자 . 전자라고 하더라도 역시 원자 . 전자를 이루는 본질이 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끈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반
합을 부정하고 사구를 부정하고 거기다 다시 아닐 비(非)자를 하나 더 붙이면 긍정이 되는데 다시 또 비(非)자를 붙이
면 부정이 됩니다. 이렇게 비차를 천자 만 자 지구를 몇 바퀴 돌 수 닜는 비자를 붙여서 사고 . 관념을 초월하자는 궁
국적인 듯을 밝히려는 목적으로 백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이 자리, 산 보고 높은 줄 아는 이 자리는 사구로도 설명될 수 없고 백구(百句)로도 안됩니다. 말을 붙
이면 붙이는 대로 모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작다고 하면 바늘로 찌를 수도 없이 작고 몇 천만억배로 확대해 볼 수
있는 현미경으로도 살펴 볼 수 없는 자리입니다. 또 크다고 할 때는 몇천만억배의 우주를 제망중중 무한대 수로도 비
교할 수 없이 마지막으로 큰 이 마음자리는 작으면 작은 대로 큰거고, 크면 큰 대로 작은 자리입니다. 그런자리에 무
엇이 가고 올것이 있겠느냐는 겁니다. 천 백억 화신을 나타내서 천백억세계에 부처님의 몸을 한 분씩 나누어 중생들을
모두 제도했지만 오고 간 것이 아닙니다. 소승경전만 잘못 본 사람은 실달태자가 이 세상에 실제로 오셔서 팔상성도
(八相成道)하셨고 칠십구세에 진지를 잘못 잡수시고 혹은 돼지고기 잡수시고 잘못 되어 돌아가신 것으로 말하는 사람
도 있지만, 대승경의 도리를 아는 이 부처님의 참 모습, 마음자리를 아는 이는 부처님이 모뚱이로 이 세상에 출현하셨
지만 온 것이 아니고 가셨어도 간 것이 아닌 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의 지혜, 대승의 지혜로 볼 때는 신이 나타나고 하느님이 나타나는 것이 다 도깨비이고 설사 시방제불
이 나타났다해도 다 도깨비들이 나타난 것밖에 안됩니다. 상(相)으로 나타난 그것을 참으로 있는 것으로 보면 속는 것
이고 견성성불과는 천리만리 떨어진 것입니다. 하물며 부처님이 오시고 가시고 앉고 눕고 하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
까. 그것은 부처님의 육신상을 보고 하는 말이므로 참 부처를 본 것이 아닙니다.
威儀寂靜分 第二十九 끝.

原文
一合理相分 第三十
須菩提야 若善男子善女人이 以三千大天世界를 碎爲微塵하면 於意云何오 是微塵衆이 寧爲
多不아 甚多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若是微塵衆이 實有者인댄 佛이 卽佛說是微塵衆이니
所以者何오 佛說微塵衆이 卽非微塵衆일새 是名微塵衆이니이다 世尊하 如來所說三千大天
世界도 卽非世界일새 是名世界니 何以故오 若世界-實有者인댄 卽是一合相이니 如來說一
合相은 卽非一合相일새 是名一合相이니이다 須菩提야 一合相者는 卽是不可說이어늘 但凡
夫之人이 貪着其事니라.

原文解釋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먼지를 만들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먼지를 많다고
하겠느냐.』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 그러냐 하오면 만일 이 먼지가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이것
을 먼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이오니, 그 까닭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먼지는 곧 먼지가 아니오라
이런 것을 먼지라 하신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삼천대천세계도 곧 세계가 아니므로 이것을 세
계라 하신 것이오니, 왜 그러냐 하오면 만일 세계가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로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온
데,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로 된 것>은 곧 <하나로 된 것>이 아니므로 이것을 <하나로 된 것>이라 하셨사옵니
다.』 『수보리야, <하나로 된 것>은 곧 말로 할 수 없는 것인데 다만 범부들이 그 일을 탐하고 집착하느니라.』

科解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이란 이치와 상, 곧 진리와 현상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라는 도리를 설명했다고 하여 지어진 이
름입니다. 혹 「일합이상분」이라고도 하나 이 대문은 본래 법신(法身)이나 화신(化身)이 하나여서 다르지 않다는 옛
보살님들의 논(論)에 따라 이(理)자 대신 이(離)자는 잘 쓰지 않습니다.
티끌이나 세계가 그대로 하나의 법신자리이고 현상계가 그래로 진여(眞如)의 마음자리이며 일체법이 개시불법(皆是佛
法)이니 이치와 상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현상계의 삼라만상은 하나의 진여에 통해서 하나로 된 일합상
(一合相)임을 말씀한 대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합상에 집착해도 안되는 것이니 그 일합상은 말이나 글로 풀이되는 것이 아니고 생각으로 따
져서 알아지는 것이 아닌데 범부들이 그것을 탐착한다고 크게 경계하기까지 합니다. 앞 장에서 법신은 상이 아니고 삼
십이상 팔십종호의 화신으로 여래의 진신인 법신을 알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고 상을 여읜 여래의 참 모습은 가고 오
고 앉고 눕고가 없다는 말씀을 하셨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현상과 마음이 하나여서 여래는 하나에도 머물지 않으시고
이것 저것이 다른 데에도 머물지 않으심을 밝히시게 된 것입니다.

設義
없음.
一合理相分 第三十 끝.

原文
知見不生分 第三十一
須菩提야 若人이 言하되 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라하면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是人이
解我所說義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是人이 不解如來所說義니 何以故오 世尊이 說我見人
見衆生見壽者見은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일새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니라 須菩
提야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於一切法에 應如是知며 如是見이며 如是信解하야 不生
法相이니 須菩提야 所言法相者는 如來說卽非法相일새 是名法相이니라.

原文解釋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나라는 소견>. <남이라는 소견>. <중생살이라는 소견>. <오래
산다는 소견>을 말했다」고 하면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이 사람이 내가 말한 뜻을 안다고 하겠느냐.』 『아니
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알지 못한 것이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나라는 소견>. <남이라는 소견>. <중생살이라는 소견>. <오래 산다는 소견>은 곧 그것이 <나라는 소견>. <남이라는
소견>. <중생살이라는 소견>. <오래 산다는 소견>이 아니오니, 이런 것을 <나라는 소견>. <남이라는 소견>. <중생살
이라는 소견>. <오래 산다는 소견>이라고 하시었기 때문이옵니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이는 일체의 법에 대하여 마땅히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고 이렇게 믿고 깨달아서 법이란 생각을 내지 말 것이니라. 수
보리야, 법상이라 하는 것은 곧 법상이 아니니 이런 것을 여래가 법상이라 말하느니라.』

科解
부처님께서 처음부터 「이렇게 마음을 항복하고 이렇게 머무르라.」하신 것을 비롯해서 「<나라는 생각> . <남이라는
생각> . <중생살이라는 생각> . <오래 산다는 생각>을 끊어야 보살이라」하셨습니다. 또 「아무데에도 마음을 두지 않
고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마음을 내라(而生其心)」하셨고, 많은 사구게(四句偈)를 말씀하셨는데 「이런 것이 불법이
다. 이런 법을 얻으면 부처가 되겠다.」하는 생각을 가지면 그것이 법에 대한 집착이 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금강경에
대한 뜻을 총체적으로 결론하여 일체의 지견을 끊으라는 말씀이므로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이라 했습니다. 금강반야
의 법문을 듣고 「이런 것이 반야바라밀이구나.」하는 법에 대한 집착을 가져서는 안 되며 여시(如是)하게 알고 여시
하게 받아 지니고 여시하게 깨달아서 「여시여시」하라는 말씀을 하신 대문입니다.

設義
없음.
知見不生分 第三十一 끝.

原文
應化非眞分 第三十二
須菩提야 若有人이 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로 持用布施라도 若有善男子善女人이 發菩提
心者하야 持於此經하되 乃至四句偈等을 受持讀誦하며 爲人演說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니
云何爲人演說고 不取於相하야 如如不動일지니 何以故오 一切有爲法이 如夢幻泡影하며 如
露亦如電하니 應作如是觀하라 佛說是經已하시니 長老須菩提와 及諸比丘比丘尼와 優婆塞
優婆夷와 一切世間天人阿修羅가 聞佛所說하고 皆大歡喜하야 信受奉行하니라.

原文解釋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지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보시했더라도, 다른 선남자 선여인이 보살심을
내어 이 경전을 지니되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어 남을 위해 연설해 주면 그 복이 저 복보다 더 뛰
어나리라. 어떻게 하는 것이 남을 위해 연설하는 것인가. 상을 취하지 않고 여여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라. 그 까닭
은 이러하니라.』 『일체의 함 있는 법은 꿈같고 꼭두각시 . 거품 . 그림자이며 또한 이슬같고 번개같거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여 마치시니, 장로 수보리와 비구 . 비구니와 우바새 . 우바이와 여러 세
계의 하늘사람 . 세상사람 . 아수라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모두 다 크게 기뻐하며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

科解
제삼십이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은 부처님의 응신(應身)이나 화신(化身)은 참다운 법신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한 대문
입니다. 물질적인 보시를 아무리 많이 해도 설법하는 공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참다운 설법은 이 세상의 온
갖 현상에 대해 마음을 이끌리지 말고 여여부동하라.」 곧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도리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확실히 꿈인 줄 알면 무엇에 집착할 것이 없으며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사람이 뒤에 있는 줄만 알면 꼭두각시에 홀려지
않게 되는 것처럼 현상계에 대해서도 그렇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응화비진분의 내용은 「須菩提 若有人以滿에서 應作如是觀」까지이고 그 다음 「佛說是經已」에서 끝까
지의 내용이 유통분(流通分)에 해당합니다. 제일 처음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을 설명할 때 말한 것처럼 어떤 경이든지
경 전문을 서분(序分) . 정종분(正宗分) . 유통분(流通分)의 세 부분으로 나누는데 그 가운데에는 부처님의 말씀뿐이며
본론에 해당하는 정종분과 서분과 유통분은 경을 결집할 당시 아란존자의 말씀으로 엮어진 것이며, 부처님 말씀 앞 뒤
에 붙여서 법회(法會)를 하기 전과 마친 뒤의 경위를 간략히 설명한 부분입니다. ]

設義
꿈의 실상(實相)
경전을 천독만독 억만독하라는 것은 한 번 읽어서는 경의 깊은 뜻이 이해되지 않지만 두 번 읽고 세 번 읽고 여러번
읽는 동안에 그 뜻이 조금씩 깨달아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내가 한번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게 되는데 이
제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더 해야겠습니다. 꿈이 과학이라는 것은 사람이 확실히 경험할 수 있는 심리학적 내용을
가지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인데, 그리고 꿈에 대해 그 동안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얘기해 왔는데, 먼저 꿈에 대한 시간
을 말하겠습니다.
사람이 자는 시간은 대체로 하룻밤에 일곱 시간 내지 여덟 시간이므로 내가 잠이 든 전시간 동안 꿈을 꾸었다고 해도
여덟 시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꿈속에 들어가서는 여덟 시간만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자는 동안
꿈속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닷새 사는 때도 있고 한 달 사는 때, 몇 해 사는 때, 까딱 잘못하면 한평생을 사는 때도 있
습니다.
그러니까 밤을 새워 가며 꿈을 꾸었다 하더라도 여덟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는데 그것이 꿈에 들어가서는 일평생이
되는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나 반나절 꿈도 꾸지마는 저녁마다 일평생 꿈을 꿀 수도 있는 것이므로 생시에 산 시
간보다 꿈속에서 사는 시간이 훨씬 더 많게 됩니다. 그러면 「꿈을 꾼 실제의 시간은 얼마 동안이냐.」 꿈을 꾼 시간
을 조사해 보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제일 쉬운 방법은 잠이 들어 있을 때 눈동자의 움직임을 보아
알아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눈 위에다 가만히 가볍게 손을 대고 있으면 꿈을 꾸는 사람은 눈동자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눈동자는 우리
가 눈 감고도 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눈동자가 놀지 않고 가만히 있는 때는 꿈을 꾸지 않는 때로 판단합니다.
이제 꿈 꾸는 시간이 오분동안이라면 눈동자가 움직이는 시간도 오분 동안이 되는데 단 오분 동안에 꾼 꿈을 이야기
하라고 하면 꿈속에서는 하루도 살고 이틀도 지내고 때로는 한 달 산 것도 이야기합니다.
꿈을 꾸는 실제의 시간은 연구 조사한 사람에 따라서 일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의 조사 결과는 사십오분 걸렸다고
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삼십육분걸렸다. 삼십오분 걸렸다, 이렇게 차츰차츰 줄어서 심지어는 결국 모든 꿈은 단 일초
동안에 이루워진다는 결론까지 나옵니다. 이렇게 보면 현실에서는 일초 동안의 짧은 시간이지만 꿈속에 들어가서는 오
십년 . 육십년의 긴 생활을 경험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사십오분 가지고 십년 . 오십년을 봤다는 얘기는 일초를
가지고 십년 . 오십년을 만들어 살았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사십오분이 십년이 될 수 있고 십 년이 또한 단 오분
이 될 수 있는 거나 일초 가지고 십년 살았다는 얘기나 마음대로이기는 마찬가지고 사십오분이나 일초나 시간을 초월
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원리라 하겠습니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하면 일초보다도 훨씬 작은 몇 만분의 일초쯤 되는 시간을 가지고 몇 해의 긴 꿈을 꾸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차츰차츰 올라가다 보면 나중에는 시간도 아닌 것, 시간이 채 움직일까 말까하는 아주 짧은
순간에 과거 . 현재 . 미래의 무궁한 세계를 꿈에 가서 창조한 것이 됩니다. 시간이 아닌 것을 가지고 우리가 꿈에 가
서 항상 시간을 만들어 살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시공을 창조
우리는 마음으로 꿈속에서 시간을 창조하여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서 아들 딸 낳고 그 아이 기르고 교육을 시킵니다.
유치원에서 국민학교로 중 . 고등학교에 보내느라고 가정교사를 대어 입학시험준비도 시키고 해서 교육을 마치고 나면
또 결혼을 시켜 가지고 슬하에 손자를 많이 두게 됩니다. 우리가 생시의 현실사회에서 한평생 산 그대로 꼭 생시와 똑
같은 남녀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까 말한 것처럼 꿈속에서 이렇게 한평생을 살았다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 시간이 움직이기도 전의 순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하튼 시간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고 하면 그 곳에도 공원이 있고 공장이 많았을
것이며 사회가 있고 우주가 있으니 이것은 무한대 공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한대 공간 이것은 참말 공간
이냐 하면 그것도 작은 점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이런 무한대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걸음 더 나
아가 생각하면 억만분의 일에 해당하는 점을 가지고 무한대 공간을 본데 불과하고 자꾸 자꾸 이렇게 추구해서 따져 나
가다 보면 점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무한대의 공간으로 창조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꿈이란 확실히 마음이 창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궁한 시간이나 무한대의 공간이 찰나도 점도 아니어서 말하자면
시간도 아니고 공간도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간도 아닌 것 시간도 아닌 것을 물질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가지고 우리가 시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체가 움직이고 있
는 것이 시간이라는 정의에 의해서 평소에 시간이란 물질계의 한 현상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고 무엇
인가 움직인다고 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간 . 공간이 현실적으로 존립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진다는 말입니
다.
그러니까 꿈에 시간이란 하나의 물질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꿈에는 공간도 아니고 시간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무궁한
세월이 흘러 갔다고 생각하고 무한대의 공간이 벌어져있는 것 같이 생각하는 관념이 꿈을 꿈을 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원리가 현실적으로도 존재하는가 하는 것을 한번 비유해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가령 여기서 조그만 거울을 가지고 남산에 올라가서 시내를 비추어 보기로 합시다. 그러면 서대문에서 동대문 . 남대
문 . 청량리까지 다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작은 거울속에 거울의 몇 억만배도 넘는 큰 서울의 질량이 그대로 변
함 없이 나타납니다. 사람만한 것은 사람만하게 보이고 자동차만한 물건도 빌딩도 각각 자기의 크기 그대로 비춰져서
나타납니다. 또 거리도 일미터 떨어진 것 백미터 떨어진 것 일키로 이키로의 거리가 각각 조그만 차이도 없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거울에 나타난 서울은 한 개의 그림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림이라고 하면 또 실제의 청량리가 거울 안에 들어
와 똑같은 크기로 나타날 수는 없는 겁니다. 작은 손바닥만한 렌즈 속에 큰 서울을 그대로 옮겨다 떼어 놓는다면 북악
산이 깨알 만큼한 크기로 될 것이고 남산이 콩알만한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남산에 가서 거
울을 비춰 보면 확실히 서울만한 질량이 그대로 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착각하는 것입니다. 광학상(光學上)의
원리가 그렇다고 하지만 광학 자체도 결국 우리의 감각작용상 작은 것이 큰 것으로 착각된다는 사실을 밝힌 것에 불과
합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보이느냐. 이유 없이 그렇게 보인다고 해야 합니다. 꼭 무슨 이유가 있다면 우리의 이 마음이 신기
해서 신통으로 그렇게 작은 것을 크게 본다는 것입니다. 이 거울 반만한 작은 거울을 가지고 비추어 보더라도 역시 서
울은 큰 거울과 똑같이 보이게 됩니다.
만약 이것을 더욱 작은 것으로 차츰차츰 더 줄여서 나중에는 사람들이 육안으로는 못 볼 정도의 작은 거울이라 하더라
도 그 속에 비춰진 서울은 그 크기가 변함 없이 그대로 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과학이 발달해서 산소나 수소나
원자처럼 작은 거울이 나타났다면 원자 크기의 거울 거기에도 역시 서울만한 것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작
아지고 작아지다가 작은 것까지 없어진 것 나중에는 작은 것이 없어진 것까지도 없어진 상태에 도달하면 우리 마음의
참 거울이 드러날 것입니다.

아무 것 아닌 것조차도 아닌 것
우리의 이 시간 공간이 본래 마음이고 보면 지금 우리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 이것은 시간도 공간도 아니기 때문에 아
무 것도 아닙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이무 것도 아닌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말 듣고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경을 읽고 있는 그 마음자리가 참 거울입니다. 돌을 갈아서 무엇을 비추게 했다든지
유리의 뒤에 약을 붙여서 비추게 하든지 해서 만든 거울은 죽은 거울이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배거울이 있습니다. 이것은 허공도 아니고 공기가 없는 진공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
고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아닌 것조차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기에도 무엇이 나타났습니다. 지금 여러
분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보배 거울인 것입니다. 지금 내가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리가 물질로 만든 거울은 다 죽은 거울들이고 여기 우리의 마음은 즉 산 거울입니다. 아는 능력을 지닌 거
울이기 때문입니다. 이 보배 거울은 생명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고 나의 참 모습이라 할 수도 있으며,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고 불성(佛性:부처될 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마음은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에 맞지 않았을 경우에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은 작다고 한다면 작다가 작은 것도 없어져버린 경지, 말하자면 무한소(無限小)가 됩니다.
이 무한소는 결국 무한대(無限大)와 동일한 통일경(統一境)이 되어 마침내 모두가 다 <마음>뿐이고 <나>일 뿐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나의 법문을 듣고 앉아 있는 여러분의 이 <아무것도 아닌 것>, <마음> 오직 그것뿐입니다.
무한소가 무한대로 통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 우주가 다 이것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고 무한소 . 무한대로 한계가 없
기 때문에 하늘 . 땅 . 태양계 . 은하계 할 것 없이 가득차 있다는 말입니다.
한계가 있다면 어디는 있고 어디는 없어야 할 것이지만 이 마음은 무한소 그대로 무한대이고 전 우주 그대로이기 때문
에 꿈을 꾸는 찰라에 우주를 이루고 시간세계 . 공간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작다 작다 작은 것조차 없
어진 이 무한소(無限小) . 바로 그곳에 무한대의 세계인 대 우주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우리가 꿈을 꾸는 그 꿈속의 우주나 생시에 보는 이 우주나 똑같은 우주인데 그 우주가 이 아무것도 아닌 여기에 나타
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구도 있고 태양도 있고 별들도 있고 무한대 허공도 있고 모든 온갖 것이 다 이루어져 있는
겁니다.

꿈으로 불법을 이해하면 쉽다
이와 같이 마음을 꿈으로 풀어 보면 확실해지고 재미있습니다. 저녁마다 꿈속에서 우리가 대우주를 창조합니다. 그렇
지만 꿈 세상이 생시에 살던 세상과 너무 똑 같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꿈인 줄 모릅니다.
어머니가 나를 낳아서 유치원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했는데, 그리고 내 아들 딸들도 내가 나온 대학에 다 들어갔는데,
우리 어머니가 나를 낳아 키운 이 몸 말고 내가 어디 또 따로 있기에 이것을 꿈이라고 하느냐. 생시가 따로 있을 수
있느냐. 이렇게 됩니다. 감히 꿈이려니 의심도 안합니다. 그 꿈 세상이 참이고 생시라고만 믿고 살 뿐, 정말 생시는 아
예 부인합니다. 그러다가 꿈을 깨고 나면 옷어 버립니다. 그래서 꿈이 되고 생시가 됩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수십년을 살면서 아들 딸 다 낳고 교육시키고 하지만 꿈을 깨고 나면 손목시계는 일분도 안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시의 일분 이것은 참말로 알고, 꿈속의 수십년은 거짓말인줄 알지만,꿈나라의 시간도 역시 육십초
가 일분이고, 육십분이 한 시간이고, 이십사시간이 하루고, 삽백육십오일이 일년인 그런시간으로 아들 딸 여러 남매를
낳아서 키웠으면서 이것은 소홀히 압니다. 그러나 꿈은 천년 만년이지만 생시는 모아봐야 십년도 안됩니다. 이런 꿈과
생시가 번갈아 반복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참말이고 어떤 것이 꿈이냐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일분전에 살던 생시를 꿈에 가서는 부인하지
만 우리가 저녁마다 꾸는 꿈은 생시에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 머리에 어느 것이 더 많이 남아 있습니까.
꿈에 들어가서 깜박 잊어버리는 얼마 안 되는 생시 이것이 꿈인가. 생시에도 잊지 못하는 천 년 만 년 되는 꿈이 생시
인가. 생시를 깨면 꿈에 들어간 꿈이 되고 꿈을 깨면 생시에 들어온 꿈인데, 생시를 깬 꿈에는 생시는 완전히 부정됩
니다. 또 간밤 꿈만 꿈이아니라 생시에는 사는 것도 살아 놓고 보면 다 꿈입니다. 지나가고 나서만 꿈이 아니라 생시
가 지나가기 전에도 깨어 있는 이대로 꿈입니다. 왜냐 하면 꿈을 깨기 전까지는 꿈인 줄을 확실히 모르기 때문인데 깨
지 않고 꿈인 줄 모르는 그대로가 꿈이듯이 생시도 똑 같습니다. 생시가 꿈인 줄 모르는 생시 그대로 생시 그것도 꿈
입니다.
한국 갑부가 되어 돈을 마음대로 쓰면서 몇 십년 호강을 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전체가 다 꿈입니다. 돈이 모였다
는 것, 갑부가 되었다는 것도 꿈이고 거지가 되어 돌아다녔다는 것도 꿈이고 모두 헛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낮 꿈으로
나와 있으니까 이 낮 꿈을 깨기 전에는 이게 꿈인 줄 알 도리가 없지만 그것은 꿈속에서 꿈인 줄 모르는 것과 같습니
다. 이러한 꿈속에는 꿈 아닌 소식, 꿈밖에 있는 자기 참 얼굴은 모르고 꿈속에 행동하는 겉 마음밖에 모르는 것이 인
생입니다.
그래서 먹어야 한다는 관념 때문에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다 생시가 꿈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저
지르는 짓들입니다. 꿈에도 사실은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고 하루 세 그릇씩 꼭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꿈에도 싸
움을 하고 전쟁을 하고 생존경쟁을 합니다. 일초도 안 되는 시간에 많은 싸움을 하고 생존경쟁을 하면서 수십년 동안
사는 꿈으로 됩니다.
연애 꿈을 꾸었을 때는 그게 꿈이 아니었더라면,깨지나 말았더라면 할 것입니다. 연애도 오래 해 보고, 부자가 되어 자
가용 차도 타고 수천명 부하를 거느리고 멋지게 살아봤으면 하고 꿈에서라도 이 소원을 성취할 수 있게 꿈좀 꾸어 봤
으면 좋겠다고 할 것입니다.

한 달 동안 꿈만 꾼 여인
옛날 평안도 어느 산골에 감자 농사나 지어서 겨우 살아 나가는 외딴 농가가 한 집 있었습니다. 하루는 사람을 사서
감자 밭의 풀을 매게 됐습니다. 아내는 집에서 감자를 가지고 적도 부치고 수재비도 만들어서 일꾼들의 점심을 해가지
고 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점심 시간이 두세 시간이나 지나도 아내가 오지 않자 남자가 집으로 달려가는 도중에 아
내를 만났습니다. 그는 점심을 가뜩 해 오다가 길 옆에 내려 놓고는 누워서 딩굴고 웃고 헛소리를 하고 미쳐 있는 것
이었습니다. 남자는 즉시 약을 먹이고 침을 놓고 온갖 수단을 다 썻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들과 산으로 돌아 다니고
춤도 추고 노래 부르고 웃고 또 내외간에도 말 못할 이야기도 막 하고 그럽니다.
남자는 할 수 없이 아내의 손발을 묶어 방안에 가두고 재워 놓았더니 거의 한 달 후에 깨었습니다. 이리하여 제 정신
이 돌아 오기는 했는데, 웬일인지 자꾸 울기만 합니다. 하두 이상해서 친정 어머니가 한 달 이상을 두고 달래면서 물
어 보니 아버지한테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몇 번을 당부한 뒤에 다음과 같은 사연을 말했습니다.
「사람을 사서 일하던 그날 밥을 해 가지고 밭으로 나가려는 참인데, 웬 초립동 소년이 예쁜 당나귀를 타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초립동을 보니 옷도 잘 입고 얼마나 잘났는지 세상 사람들과는 대조할 수도 없이 뛰어나 보였습니다.
이 초립동이 자기 옆에 탁 무릅을 꿇고 앉았다가 일어서서 하는 말이 「대단히 실례입니다. 우리 집은 아무 데에 있고
우리 부모는 누군데 정승 판서 집이고 농사는 수만 석을 하는 부자입니다.
내가 일년전에 부자집 처녀에게 장가를 들어 정이 깊이 들었는데 자식도 하나 낳아 보지 못한 채 금년 봄에 죽었습니
다. 이렇게 홀로 된 나는 궁리하기를 죽은 마누라는 다시 만날 수 없으므로 할 수 없이 마누라와 똑같은 여자를 만나
서 살겠다고 결심하고 이렇게 팔도강산을 헤메고 있던 중 오늘 이곳을 지나다 보니 당신은 우리 마누라와 조금도 안
틀리고 똑같이 생겼습니다. 당신이 이런 두메 산골에서 감자농사나 지어먹고 살면 되겠습니까. 지금 당장 이 당나귀를
타고 이 길로 곧장 갑시다. 이 당나귀는 하루에 천리를 가는 말이니 잠깐 가면 됩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만 마음이 끌려 살림살이고 뭐고 정신이 다 나가버린 채 그 당나귀를 타고 같이 가는데 어찌나 빨리 달리던지
삽시간에 강과 들판을 지나서 산골짜기를 들어가니 남녀 하인들이 마중을 나와 인사를 합니다. 그들 하인이 입은 옷
모양과 미모가 어찌 뛰어났던지 자기 같은 것은 곁에 서지도 못하게 잘 생겼습니다. 동구(洞口)안으로 들어가니 큰 동
네가 있는데 전부가 기와집이고 낙원 같은 좋은 집에서 조부모 시부모도 마중나와 환영해 주었습니다.
나는 데운 물로 목욕을 하고 그곳에서 주는 옷을 갈아입고서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보니 내가 언제 이렇게 예뻣던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면서 해마다 아들 딸을 자꾸 낳고 그 집의 살림살이도 다 차지했습니다. 예쁘고
잘난 얼굴만 해도 천당에 사는 느낌인데 아들들도 재주가 다 좋아서 공부 잘하고 참 재미나게 한 십년 호강을 하고 있
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뜻밖에 전신이 아프고 몸이 부자유해서 고함을 질러 보니 꽁꽁 묶여 있는 것이었습니다.」하
고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 미친짓하는 동안 십오년을 살았고 그래서 꿈속에서 정든 아들과 남편이 보고 싶어서
우는 것이니, 이 소리를 누구 보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한번 더 미쳐 가지고 가 봤으면 좋겠다」하면서
그 꿈이 그리워 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꿈을 못잊고 사는 것이 인간이기도 합니다.
꿈속에 평생을 산 조신대사
여하튼 중생인 우리는 마음을 깨치지 못하는 한 모두 꿈속에서 사는 것인데 전부 자기 마음으로 꿈을 꾸어 가지고 그
속에서 시집간다, 장가간다, 살림살이 차린다, 아들딸 낳는다 하는 것이니 마치 아까 산골 밭에서 정신이상된 여자가
정상(正常)을 잃은 채 웃으며 행복한 생활을 의식하는 꿈속의 생활과 같습니다. 요새 꿈에 대한 학자가 과학적으로 연
구한 바에 의하면 꿈이란 큰 꿈이나 작은 꿈이나 최고의 시간이 45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이 45분이면 며칠도 되고
몇 년도 되고 일평생되는 꿈으로도 된다는 것입니다.
조신대사의 실제 꿈을 이 광수 선생이 「꿈」이란 역사소설로 엮어서 세상에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옛날 신라 때 조
신 대사라는 스님이 강원도 낙산사(洛山寺)에 있을 적인데 법당에 사시마지(巳時供養)를 올려 놓고 경쇠(법당에 있는
작은 종)를 땡하고 치는 사이 깜박하고 졸음을 조는 동안에 80년 긴 꿈을 경험했습니다. 이 경쇠라는 종은 천천히 때
리면 소리가 죽고 힘껏 빨리 때리고 가만히 있어야 소리가 죽지 않습니다. 그 경쇠를 때리는 순간은 몇 십분의 일초에
불과합니다. 깜박하고 조는 순간 중노릇하는 현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꿈속에 들어가서 그 고을 사또님 심부름으로
마을에 내려가는 도중이었습니다. 내려가다 보니까 단골 신도인 무남독녀 딸 하나가 있는 신도 집이 있는 곳을 지나게
됐습니다. 그 집은 다른 일가친척도 없고 살림은 한 삼백 석 하는 시골의 부자였습니다. 그 처녀에게 장가를 들면 누
구든지 삼백 석을 얻어 팔자가 핍니다.
그 집은 일 년에 몇 번씩 조신대사가 있는 절에 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그때마다 그 처녀가 어머니를 따라오는 것을
보아 왔는데 이제는 시집갈 때가 되었던 것입니다.
조신 대사는 지나가는 길에 그 집에 들러서 인사나 하고 가기로 마음 먹고 잠깐 방문했습니다. 사또님 심부름으로 어
디까지 가는 연유를 말하니 돌아오려면 저물겠다고 하면서 집에 와서 저녁 자시고 가라고 친절히 해 줍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볼일 보고 늦게야 올라오다 보니 어두워지고 나서야 그 신도 집에 도달하게 됐습
니다. 그 신도 집에서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반찬감만 장만해 놓고 밥도 안 짓고 반찬도 안 만들고 있다가 조신
스님이 들어오니까 하인에게 「밥해라 반찬해라.」하며 부랴부랴 시켜 놓고는 스님과 법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집안식
구 모두인 모녀도 이제까지 밥을 먹지 않고 조신 대사가 오면 같이 먹는다고 기다렸다가 밥상이 들어오니 같이 먹도록
했습니다.
그 때는 불교가 크게 융창했고 스님들에 대한 대우가 대신보다 더 존경하던 신라 때였습니다. 딸 방에서 진수성찬을
차린 저녁 밥상을 놓고 셋이서 같이 먹고는 법문해 달라고 해서 아는 대로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들은 그
만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을 모른다는 식으로 시간이 오래 지나가서 한밤중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 사람들이 다 잠을 자는데 십여리나 가기도 어렵고 그 집에서는 자고 가라고 붙잡는 바람에 그대로 자게 됐습니
다. 그리고는 어머니 신도는 어떻게 된 건지 그만 자기 딸과 조신 대사를 한 방에 가두어 놓고 문을 잠가 버렸습니다.
조신 대사는 그래서는 안될 것인 줄은 알지만 어려서부터 잘 알고 서로 얘기도 하고 친숙하게 지내다가 그렇게 되어
놓으니까 그만 그날 저녁에 장가를 들어 버렸습니다. 이제 절에는 다 갔습니다. 그래서 지금 심부름 갔다 온 사정을
보고할 수도 없고 그만 그 집에 숨어 가지고 머리를 길러서 상투를 얹고 결혼식할 새도 없이 신혼생활을 했습니다.
그 해에 단번에 아들을 하나 낳았고 소문도 없이 감쪽같이 그러고 있는 판입니다. 그러데 해 마다 아들을 낳아 꼭 달
팽이 같은 아들을 수두룩하게 낳았습니다. 그 놈들이 자꾸 크고 두 살 세 살 되면 천자 다 외고 글도 가르치고 했는데
공부를 다 잘합니다. 이렇게 해서 8년만에 아들 팔 형제를 낳았습니다. 그때는 한문 짓는 어려운 문장인데도 글 잘짓
고 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리고 그리고 말 잘하고 얼굴도 잘 생겼고 이래서 서울에 올라가면 단번에 급제를 합니다.
아들들이 경상 감사 . 전라 감사도 있고 평안도 충청도 나중에는 팔도강산에 다 자기 아들들이 있게 돼서 나라 임금보
다 오히려 권력이 센 편이 됐습니다. 집안 살림도 삼백 석짜리가 이제는 십만석이 넘었고 아까 나귀 타고 간 처녀보다
훨씬 더 재미나게 잘 삽니다.
그런데 큰 아들이 죽고 둘째 아들이 죽었고 그리고 나서 한 10년이나 지났는데 아들 딸 형제가 다 죽고 며느리 다 죽
고 손주들까지도 다 죽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끝내는 자기 마누라도 죽고 자기 혼자 늙은 몸으로 나쁜 부하들한
테 재산도 다 빼앗기고 이제는 하인들까지 전부 다 달아나 버려서 자기 혼자만 남게 됐습니다. 아차하다가는 그 놈들
한테 맞아 생명도 위험하게 되었고, 재산을 다 빼앗기고 보니 있는 돈이나 꾸려 꽁무니에 차고는 팔도강산 유람차 나
섰습니다. 구경 다니는 판입니다.
세상이 허망해도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까 꿈을 깨어 가지고 자꾸 울어대는 그 여자보다 더 허망할 것입
니다. 그래 이리저리 한없이 돌아다니다가 가을이 됐는데 해는 저물고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파서 길가 잔디 밭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신세 한탄을 하며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산 위로부터 절에서 종치는 소리가 은은히 울려 내려 옴을 느끼고 근처 어딘가에 절이 있는가 보다 하
고 가만히 살펴보노라니 자기가 십여년 전에 살다가 떠났던 집 근처 낙산사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였고, 자기가 앉은 그
자리가 바로 자기가 살던 그 집터였습니다. 지금은 잔디밭이 되었고 쑥대들이 나오고 거기 있던 동네는 어디로 갔는지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제는 꼼짝없이 큰일 났습니다. 내 나이 벌써 아흔이 다 되어서 이제는 오늘밤에 죽을는지 내일
아침에 죽을지 모르는 판이 됐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하지 말라던 이백오십 가지 계를 낱낱이 다 파계하고 팔만 가
지 세행(細行 : 주의할 작은 계)다 부숴 버리고 이제 눈만 감으면 꼼짝없이 지옥에 갈판이니 생각하면 전신이 떨려옵
니다. 이제 곧 죽게 생겼는데 부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은 다 범해 놨으니 진작 이렇게 허망한 줄 알았으면 차라리
장가 안 가고 그날 저녁 내가 절로 올라갔으면 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 하루 저녁을 못 참고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이
제 죽기만 하면 지옥행은 끊어놨고 아들 딸이 또 그렇게 다 죽을 줄도 모르고 있다가 이제 몸은 늙고 곰곰히 신세를
생각해 보니 기가 막힙니다.
그동안 하던 공부나 열심히 했더라면 성불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아닌 자기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이 모양 이
꼴이 됐으니 내가 그렇게 어리석었던가 하고 탄식하며 두 다리를 뻗고 방성통곡하고 울다가 깨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자기가 깜빡하고 졸기전에 경쇠를 치던 망치를 잡은채 그대로여서 경쇠의 종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습
니다. 몇 십분의 일초가 지났을까 말까 한 짧은 찰라에 아흔 살이 지났으니 당시 스님의 나이 스물 대여섯살이 되었다
고 치면 한 육십여년 근 칠십년쯤 지난 것입니다. 조신 대사의 실제의 생활 경험이었고 인생의 일대 교훈이었습니다.
인간 세상이라는 게 일체의 꿈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생시는 곧 낮꿈
지금까지 여러분한테 밤꿈을 얘기했지만 우리가 깨어서 활동하는 생시라는 것도 낮 꿈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밤에 가
서 꿈속의 생시라는 것도 만드는데 내 마음 가운데서 무한대 우주를 낮과 똑같이 건립한 때문입니다. 현 생시에 에너
지로부터 모든 여러 가지가 창조되어 우주의 현실이 벌어졌듯이 이 꿈에도 가 보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꿈속에서도 사업을 하게 되고 생활을 하게 되는데 불은 뜨겁고 물은 차갑고 소금은 짜고 설탕은 달고 하여 생시의 이
자연계와 똑같은 자연계가 있는데 그것은 모두 마음이 건립한 것입니다. 마음이 만들은 것이라기 보다 마음이 그렇게
되었다고 해야 할 일입니다. 마음이 산도 되고 물도 되고 남자 여자, 호랑이도 되고 구렁이도 되고 온갖 유정물이 되
어 가는 것이 꿈의 세계, 즉 꿈의 우주인데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다 전체가 마음뿐인 때문입니다.
가령 밤에 잠이 들어 자다가 이불 속에 자기 몸뚱이와 처자를 다 그대로 놓아둔 채 마음만 나와 가지고 꿈속의 세계를
새로 만듭니다. 그러나 나온 것도 들어간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갔다 안 갔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만일 마음
이 어디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포 하나를 가지고 말하는 경우에도 이 마음은 수 억만 가지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사는 중생이면서 제일 작은 것이 제일 큰 것이 되고 큰 게 작은 것이 되는 원리와 하나가 되
다 보니 어디까지가 경계인지 그 한계를 지을 도리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 마음자리가 꿈에 가서 대 우주를 창조하게 될 능력이 있다보니 꿈속에서 자기 몸뚱이를 끌고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고 아이도 낳아 기르고 하다가 그 살림살이 그대로 다 내 버리고 어딘가 다른 세계로 나오는데 그것을 소위 생시라
고 말합니다. 꿈에 가서도 우주를 창조할 능력이 있으니까 생시에 나와 가지고도 다시 현실의 우주를 창조합니다. 생
시에 마치 활동사진의 필름을 바꿔서 새로운 화면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과 같이 금강산이 나왔다, 지리산이 나왔다,
석굴암이 나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깬다 하는 것은 내가 꿈을 꾼 그 자리에서 필름이 바뀌어 딴 필림이 돌아가게 되어 소위 생시라는 그런
영화가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밤의 꿈속에 있는 영화나 생시에 있는 영화나 다 마음의 조화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건 밤꿈이고 이건 낮꿈이고 하지만 또 따지고 보면 꿈도 없는 것이어서 생시도 꿈도 아닙니다. 지금 말하는
이대로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밤꿈은 확실히 낮꿈과는 또 다른 겁니다. 다른 꿈이니까 밤꿈은 낮꿈이 아니고 낮꿈은 밤꿈이 아닌
것입니다. 밤에도 마누라도 있고 낯에도 그 남편 그대로이고 모든 것이 다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확실히 밤꿈에 만난
자기 마누라는 지금 생시에 있던 그 마누라는 절대로 아닙니다.
꿈에 같이 산 그 마누라가 틀림 없는 자기 마누라이고 꿈인 줄도 모르고까지 살게 됩니다. 모든 것이 똑같으니까 서로
부둥켜 안아 봐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낮에 있던 마누라는 꿈 세계로 들어갈 때 자기가 재워 놓고 간 자기 몸
뚱이 옆에 자고 있으니까 밤에 있는 마누라와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자신도 밤꿈에 있던
자기 몸과 생시의 자기 몸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정말 다르지 않은 게 있습니다. 이것이 곧 <마음>입니다. 밤꿈에서도 이 마음 그대로이고 낮꿈에
서도 밤꿈에 있던 그 마음이 그대로 낮꿈을 꾸는 격입니다. 여기에 대우주의 꿈을 똑같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밤꿈이 순전히 마음의 조화라고 말한다면 낮꿈도 역시 마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밤에 굉
장한 창조의 힘을 발휘했다고 한다면 낮꿈인 지금 이순간에도 역시 그런 힘이 그대로 발휘되고 있을 것입니다. 꿈이나
생시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조화 하고자 하는 그대로 밤꿈이나 낮꿈이나 필름대로 나타나게 되는 것
입니다.

꿈속의 객관은 곧 나
마음의 본성을 깨치지 못한 범부중생들은 꿈속에 들어가서 꿈을 꿈인 줄 모르듯이 생시 이것도 낮꿈인줄 모르고 생시
라고만 보는 겁니다. 우리가 꿈을 꿀 때 그것을 생시라고 느낄 뿐 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꿈이기 때문
에 꿈을 깨 봐야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빔꿈에 들어가서는 그것이 밤꿈이고 생시의 낮꿈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낮꿈에 와서
는 밤에 꾼 꿈을 기억할 뿐 밤꿈에 있었던 일을 말 못할 내용도 있습니다. 가령 사람을 죽였다든지 윤리도덕을 어기면
서까지 범행을 저질렀다든지 그야말로 생시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을 밤꿈에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못하지
만 기억은 하고 있습니다.
밤꿈 속에서 몇 시간 며칠을 살았지만, 끔을 깨어 보면 실제는 일분도 채 경과하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 일분전에 살
던 낮꿈 소식을 전혀 모르게 되는 것이 밤꿈입니다. 다시 말하면 밤꿈에 가서는 낮 소위 생시가 있다는 것을 부정해
버립니다.
밤꿈에 생시를 모르고 밤꿈을 꿈인줄 모르게 되는 원인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꿈이 현실과 너무나 똑같기 때
문에 그걸 꿈인 줄 모르는 동시에 꿈아닌 현실이 있다는 것을 전혀 망각하게 됩니다. 또 생시가 있었다는 것을 꿈에
들어가 아무리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한다고 하더라도 듣지 않습니다. 우리 엄마가 우리 아버지와 연애해서 결혼하여 나
를 낳아서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보내고 내가 유치원 대학까지 나온 학교가 다 이렇게 엄연히 있는데 이 몸뚱이 말고
또 내가 어디 있겠느냐고 항의하게 됩니다. 이것이 왜 꿈이겠느냐. 소위 현실을 완전히 부인한다는 말인데 절대 부당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밤꿈 속에는 꿈 그것이 생시입니다. 소위 생시라는 것은 기억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밤꿈에 가서는 낮꿈을 완
전히 부인해 버립니다. 그러나 생시에는 밤꿈을 우리가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런 걸 보면 소위 생시라는 이것도 밤꿈
을 깨듯 낮꿈을 깰 수 있는 꿈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고 이것을 좀 에누리해서 밤꿈 낮꿈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밤꿈에 들어가서는 낮꿈을 다 부정했는데 이것은 낮꿈 꿀 때 생각해 보면 참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습
니다. 밤꿈에서는 언제나 낮꿈을 부정해 버리고 밤꿈에 있는 그 몸뚱이만 참이라고 하고 낮에 있는건 다 거짓이라고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오늘 저녁에 꿈을 꾸어 대우주가 나타나고 또 이 마이크가 내 기억에 잠재해 있다가 꿈에 나타나서 대중이
가득한 이 법당 안에 내가 이 마이크 앞에서 법문을 하게 된다면 이 마이크도 내 마음을 나타난 것이고 이 육체도 똑
같이 내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 육체를 만약 <나>라고 한다면 이 마이크도 <나>라는 말이 됩니다.
내 마음에서 모두 다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뚱이를 <나>라고 한 것처럼 여기에 있는 이 탁자도 나고 저 촛불
도 <나>고 저 석등도 <나>고 종도 <나>고 이 앞에 정자나무도 <나>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왜 그런 것들은 다 <나>를 안 닮았느냐. 그것은 이 육체에는 자유가 있고 감각이 있어서 연장에 발을 다치든
지 고장이 조금만 나도 아픔을 느낍니다. 그런데 왜 다른 물건들은 다쳐도 아픈 줄 모르느냐. 그것은 다같이 <나>로
나타난 것이지만 객관으로 인정하고 <나>로부터 떼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찔리거나 부러지거나 불에 타거나
아무걱정도 안됩니다. 이 몸뚱이는 <나>라고 하고 애착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손등에 가시만 들어도 큰 문제이고 우
주의 제일 큰 사고입니다. 이 육체의 경우도 몸뚱이가 <나>라는 애착을 완전히 떼어 버리면 객관처럼 도끼로 발을 찍
어도 정말 아픈 줄 모릅니다. 객관의 물질들이 아무 것도 모르듯이 지금 이 몸뚱이도 꿈이거나 생시거나 마음에서 애
착을 떼어 버리면 톱으로 몸뚱이를 썰어 내려 가더라도 아픈 줄 모릅니다. 마음이 오로지 살아 있을 뿐입니다. 이 몸
뚱이는 한 객관의 물질이고 <참 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정말 몸뚱이를 완전히 버려 버린다면 창자가 썩어서 흘러 내
려간다 해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낮꿈의 현실도 나
꿈 자체가 마음에서 나타난 것이며 동시에 꿈속에 있는 객관들도 다 내 마음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마이크 기
둥도 저 나무도 탑도 석등도 종도 전부 다 <나>라는 것을 앞에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원리는 밤꿈의 세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낮꿈의 현실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따
라서 우리는 낮꿈 밤꿈을 다 깨어서 밤꿈도 없어지고 낮꿈도 없어져서 마음이 오직 드러난 밝은 세계, 그래서 거짓으
로 존재하는 객관과 이 몸뚱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그
것은 기분을 완전히 떠나는 것입니다. 좋다 싫다 하는 기분, 밉다 예쁘다 하는 기분을 떠나야 됩니다.
모든 만물을 대할 때 모든 선입관 . 분별심 모든 기분을 떼어 버리고 무심하게 되면 곧 만물하고 나하고는 둘이 아니
고 거리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경계가 끊어져 버려서 객관 . 주관의 분간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부처
님은 부처님이고 중생은 중생이고 보살은 보살이고 또 천당은 천당이고 지옥은 지옥이고 완전히 각각 다르게 있습니
다.
그러나 이것은 중생들이 스스로 그렇게 다르게 만들어 놓으니까 그럴 뿐 실상은 다르지 않은 것이 달라져 있는 것입니
다. 내가 늘 하는 얘기이지만 육체만을 나라고 애착하기 때문에 모두 객관이 되어 주객이 벌어졌고 전 우주가 다 그렇
다는 것입니다.
꿈에 보는 태양도 억만리 허공 위에 떠 가지고 열과 광을 발산하여 제일 무더운 삼복중엔 머리가 뜨거워 모자 안 쓰고
우산 안 들고는 도저히 밖에 나갈 수 없습니다. 저 태양은 여러 수억만 년 동안 저 허공 위에서 열을 쬐고 있다고 하
겠지만 그러나 그것도 「태양은 저 높은 위에 뜨겁게 있는 거다」는 기억이 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태양은
또 저렇게 먼 데 무한대로 먼 공간에 있는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꿈에 가서 무한대의 허공을 나타나게 합니다. 생각
그것이 그대로 나타난 겁니다. 따라서 그 생각하고 태양하고는 거리가 없습니다. 생각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주관하고 객관하고는 거리가 없습니다. 주관 객관은 본래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나>
라고 하는 착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거리를 인정하게 된 것뿐입니다.
<나>의 발하고 머리하고 사이에는 거리가 있겠지마는 「나」하고는 거리가 없듯이 몸뚱이의 어느 곳이든 <나>하고는
거리가 없습니다. <나>하고는 뒤도 등도 아닙니다. 이게 그대로 나입니다. 내 등이 내 뒤가 아니고 가슴이 내 앞이 아
닙니다. 그저 이렇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 전체가 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앞뒤도 없고 좌우도 없습니다. 발이 곧 <나>자신이므로 <내>밑에 있는 것이 아니고 머리 또한 <나>이므로 머
리가 내 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내 마음에서 나타난 객관 일체가 다 <나>이니 거기에도 거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경계와 경계가
없고 주관 객관 사이에 거리가 없습니다. 전 우주 무한대의 극대(極大)와 원자 . 전자 같은 제일 작은 극소(極小)가 서
로 거리가 없습니다. 곧 하나라는 말이니 현실의 객관이 <나>고 마음이며 <내>가 곧 현실이고 마음이어서 둘이 아닙
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앞에서 말한 것처럼 조그만 거울에 서울이 나타났듯이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소위현실이라고 하는 대 우주가 곧
아무 것도 아닙니다. 대우주라고 하는 것이 작은 점 속에 있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고 현미경으로도 절대 볼 수 없
을 겁니다. 작다가 작은 것까지 없어져 버렸단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가 대우주라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렇다 보니 있다고 하는 대 우주라는 것이 점도 아니고 점속에 다 들었다 하더라도 점 그것마저 없어져서 없는 것조
차 없다는 말입니다. 가령 없는 거라고 정한다면 있는 것이 없는 거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됩니다.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공(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색불이공은 있는 현재의 모든 것은 허
공과 같고 아무 것도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또 「공불이색」은 아무 것도 없는 것 빈 것이라 해도 그 가
운데 온갖 것이 다 숨어 있다 그말입니다.
마치 텅 빈 방에 사람이 대여섯 명이 잠을 자는데 한 사람은 대구 꿈을 꾸고 한 사람은 부산꿈 꾸고 한 사람은 오대산
꿈, 또 한 사람은 설악산 꿈, 또 한사람은 서울 꿈을 꾸고 있다면 방 하나에 대구를 건설하고 설악산 . 오대산 . 서울
을 만들고 별별 세계가 다 건설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업에 따라 천당도 지옥으로 볼 수있고 복 지은 사람은 지옥을 가도 거기가 천당입니다. 착한 일 했으
니까 착한 마음에서 나타난 행복스러운 영화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죄 많은 사람은 천당에 올라가도 지옥으로 보인다
는 겁니다.
제 마음이 나타난 것이므로 지옥과 천당을 자유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그 결과를 임의로 도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
다. 인과에 따라 탄생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곧 마음이 지옥으로 나타나고 마음이 천당 사람 몸뚱이로 태어
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있다 없다 살았다 죽었다 하는 말이 안된다는 겁니다. 가령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것도
꿈속에서 중생이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학을 한다, 철학 . 종교를 한다 전쟁을 한다 해서 어느 나라는 지고 어느 나라가 이겼다고 하는 이 모두가
꿈입니다. 전부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석가여래가 성불했다 그래서 사십구년 동안 중생을 제도 했다는 그것도 모두 거
짓말입니다. 이것이 다 꿈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내꿈에 석가여래께서 지나가신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몸처럼 보이게 된다는 겁니다. 없는 것같이 보이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있
는 게 없는 거고 없는게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다 없다」말하는 것이 다 틀린 겁니다. 있다 해도 안 맞고
없다 해도 안 맞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 해도 다 틀리고 하나도 없고 말도 없고 글도 없는 것입니다.
글자는 본래 내용이 없습니다. 가령 있을 유(有)자를 본래 없을 유자라 했다면 없을 유자라고 현재도 사용할 것입니다.
글자 자체는 아무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있다 없다는 글자가 따로 있다는 말은 확실히 있다는 말이고
없다는 말은 없다는 말이 틀림없으며 있다는 말이 없다는 말도 아니고 없다는 말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확실히 우
리는 다른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러나 무엇을 가지고 어떤 게 있느냐는 것을 깊이 따져 보면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 없다고 그러지만 무엇을 가지고 없다고 하느냐. 허공을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허공도 없어지
면 그때 가서 없어지는 거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모두 내 생각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내 생각이 이러니까 모
두 생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또 생각이 그렇게 되면 그것이 나타나 보이게 됩니다.
부처도 중생도 생각도 몸도 다 꿈이다
이 모두가 꿈이라는 겁니다. 부처도 꿈이고 중생도 꿈이고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게 전부다 꿈입니다. 하

나도 실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있다고 해도 말이 되고 없다고 해도 말이 되고 있다 해도 말이 안되고 없다 해도 말이 안 되고 이렇게 안 되
기도 하고 안되고 된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자유라고 하겠습니까. 다 없어져 버린 것뿐입니다. 철학자 . 과학자 . 종교가가 와도 모든 문제에
대해 그 사람하고 똑같이 이해하고 얘기하고 듣고 긍정할 수도 있지만 또 그것을 근본적으로 절대 부인할 수도 있습니
다. 부처님까지도 꿈이고 다 쫒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쫒아가는 것도 다 꿈이고 이론으로 거부하는 것도
꿈이고 모두 꿈인 것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현실 그대로가 낮꿈 밤꿈인 줄을 대오(大悟)해서 모든 것을 쳐부실 수도 있고 다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경지에 들어간다면 정말 마음 턱 놓고 이제 할 일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고 낮잠을 잘 수도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생의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할 수 있고 어떤 마음도 가질 수가 있지만 이와 같은 마음의 바탕에 못
들어갔다면 어떤 이상을 가지고 마음 놓고 실현할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한 가지 근심걱정이 생기게 됩니다. 있을 것
이 없어 걱정이 되고 없었던 사건이 또 생길까 걱정이 됩니다. 꿈에 가서도 걱정이고 잠을 자도 잠 속에서 잠재의식에
사로잡혀 몸부림치게 되어 언제나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잠재의식이 꿈에 나타나기도 하고 안 나타날 때도 항상 마
음 속에서 잠재력으로 영향되고 움직입니다.
가령 우리가 한편으로만 누워 있게 된다면 아파서 다른 방향으로 돌아 눕게됩니다. 이 몸뚱이가 정말 있는 것이라 생
각했기 때문에 꿈에 가서도 자꾸 돌아눕게 되고 오래도록 앉아 있게 되면 궁둥이가 아파서 일어났다 앉았다 하게 됩니
다. 꿈속에 있는 궁둥이가 정말 이렇게 아프겠습니까. 그건 아플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는 겁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야
할 꿈의 몸뚱이입니다. 그러나 꿈에서도 감기 들어 놓으면 약을 먹지 않고는 일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또 기도해야 병
이 납니다. 만약 현실이 확실히 꿈인줄로 증득되지 않는다면 「오늘까지 한 공부가 다 되었나 보다」하는 생각을 지키
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은 꿈과 같다. 그러니까 「이 생시가 허망한 것이구나」하고 단정하게 되는데 꿈과 같은가 보다 하는 정
도로 생각하는 것 가지고는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가지고
는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정도의 생각으로 경을 봐서는 팔만대장경 거꾸로 외
워내더라도 부처님 밀씀 한 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정말 꿈인 줄 알면 금강경 전체 내용이 하나
도 어려울 것 없습니다.
제십칠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가운데 일체법이 즉비일체법 시명일체법(卽非一切法 是名一切法)이라는 말씀이 있습니
다. 부처님께서 일체법이라고 하는 것은 저것은 동물이고 이것은 사람이고 저것은 나무고 이것은 돌이다 하는 현상계
의 삼라일체를 통털어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은 불법이니까 정법이고 저것은 모두 다른 교당에 나가는 외도니까 사도
라고 합니다. 불법이 마음의 법인데 마음 밖에서 진리를 구한다고 해서 이름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혜안(慧眼)으로 보면 일체법이 따로 있고 불법 아닌 다른 외도가 있고 외도가 아닌 불법이 홀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꿈에 가서 부처가 있고 석가가 있다 해도 꿈에 도깨비가 나와서 설법한 것에 불과합니다. 불교도 유교
도 기독교도 다른 외도도 다 꿈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의 전부는 마음의 한 개 장난의 조화입니다. 그러니까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전부 꿈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몸뚱이 하나만을 내라고 해 가지고 하루 밥 세그릇 먹어야 하는 이 사고 때문에 전쟁을 해야하고 새파란 젊은 사람들
이 총을 메고 싸움터에 나가야 합니다. 죽게 되니까 전쟁에 나가서 죽는 그 시간만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불쌍한 것이 인간입니다. 어서 깨어나야 할 꿈입니다.

미친 것도 꿈
일본 식민치하에 있을 때 만주에 가 있던 한국사람들이 모여사는 부락이 있었습니다. 그때 만주에서 일본사람들이 만
주를 점령하려고 만주 동쪽 땅을 토벌하려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인 한 사람이 어디를 갔다 오는데 자기 부락이
온통 수라장이 된 것을 보았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와 가지고 무조건 한국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 있기만 하면 총살시켜
버리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 참멸시킨 것입니다.
동포와 가족들은 죽은 시체로 나둥그러져 있고 집과 재산은 탄 채 재만 남았고 온통 쑥밭이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런 비참한 광경을 보고서 그만 미친 사람 모양으로 고한을 지르고 대성통곡을 하며 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어
디 두고보자, 내가 꼭 이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부산 가는 기차에 막 뛰어 오는 겁니다. 기차를 못타게
하면 막 죽이려고 합니다. 「너희놈들만 타라고 만든 기차냐. 왜 조선사람은 못타느냐. 네 놈들만 잘 살 줄 아느냐.」
고 두서도 없이 욕을 마구 하며 달리는 차에 뛰어올랐습니다. 감시원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내로 목적지인 부산까지
갔는데 차에서 내리자 마자 곧장 경찰서로 들어가서는 서장을 보고 내가 지금 돈이 하나도 없으니 당신이 돈을 내라는
겁니다. 하두 기세가 대단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당신이 누구요. 무슨 용건으로 왔소」하며 호통을 쳐도 어서 잔말
말고 내가 필요한 돈이나 내 놓으라고 생떼를 쓰고 막 쓰러져 버리는 겁니다. 서장도 그 기에 눌려서 그만 어떨결에
돈을 주어 보냈는데 이 사람은 도리어 고약한 놈이라고 마구 욕을 하며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냥 나옵니다. 그래서 가
난한 사람 모두 나누어 주고 올 떼 갈 떼 없는 거지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정말로 미쳐 가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
고 너무 분개한 일념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초인간적인 힘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울다가 웃다가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기도 하고 몇 달씩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데 얼굴도 별로 축난 것도 없고 힘도 더 셉니다.
이 사람의 소문이 굉장하게 나 있었을 무렵 그해 칠월 백중날 내가 어느 절에 가서 있을 적인데 마참 어느날 그 절에
이 사람이 온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곁에 가서 「선생님 심정을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평생을 두고 울다 죽어도 분
함이 풀리지 않겠지마는 마음을 진정하시고 방에 잠깐 들어가서 이야기나 좀 합시다.」하며 좋게 대해 주고 지기 심정
을 알아 준다고 하니까 아무 말도 않고 방에 따라 들어 왔습니다. 「그동안 음식을 제대로 잡숫지도 않으셨을 텐데,
여기는 음식도 많은 데니까 오늘 여기까지 오신 김에 한번 실컷 잡수시가 바랍니다.」하고 상을 차려서 갖다 주고 옆
에서 많이 드시라고 권하면서 먹는 걸 봤는데, 몇 달 동안 먹지 않고 있다가 먹으니 굉장합니다. 밥이 적은 듯 싶어서
남은 밥 다 갖고 오라고 하여 주었더니 나물하고 김치하고 국하고 밥하고 주머니 속에서 자기가 차고 다니는 고춧가루
를 꺼내서 큰 그릇에다 한데 붓고는 숫가락을 댓개 가지고 척척 비비면서 침을 꿀꺽꿀꺽 넘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가 「이밥을 잡수지는 데까지 한번 잡숴 보십시오.」하니까 먹기 시작하는데 그 많던 밥을 다 먹는 겁니다. 소금보다
짠 김치를 막 먹고 고춧가루를 너무 많이 넣어서 보통사람은 도저히 먹지 못할 짜고 매운 것을 막 먹는 겁니다. 원체
마음이 한데 몰려서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 음식이나 의식과 애착이 없다는 겁니다. 이 많은 밥을 다 먹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위장이 늘어나지도 않고 아무 탈이 없습ㄴ니다. 소화도 잘 될 거라고 마음을 과감하게 먹었기 때문입니
다. 옆의 일행에게 물어보니 석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얼굴 하나 축나지 않았고 기운도 펄펄하다는 겁니
다. 마음 속에 일본 사람 죽이려는 생각 하나뿐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모르는 정신일도(精神一到) 상태이기 때문에 밥
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굶었다는 생각만 안 하면 배도 고프지 않고 축이
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거리에 다른 미친 사람들을 보아도 남자 . 여자 미쳐가지고 열흘씩 한 달씩 아무 것도 안
먹고 돌아 다니는 사람들도 있지만 얼굴이 그렇게 흉하게 축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 사람들 나체로 다
닌다고 미쳤다고 하지만 이 사람 사실 미친 것이 아닙니다. 가령 연애하다 실패했다고 한다면 보고 싶은 그 한 생각뿐
이어서 보고 싶으면 봐야 하는데 어떤 장애가 생겨 가지고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 분한 생각, 보고 싶은
생각 일념뿐이지 먹었든지 굶었든지 그런 것은 다 귀찮다는 겁니다. 이렇게 한 생각으로 미쳐서 딴 세상이 되어 버리
는 것입니다.
이 남자도 이렇게 일본 사람에 대한 적개심 일념으로 미쳐서 일본 경찰만 보면 욕을 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경찰서에
붙들려 유치장에 갇히었습니다. 독방을 정해 주고 음식도 자기 집에서 먹는 이상으로 갖다 주고 건강진단까지 해서 가
두었는데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하루 이틀 동안은 먹지 않는다 해도 닷새 이상은 굶을 수 없겠지 생각했는데 그러나
닷새가 되어도 계속 안 먹습니다. 그럭저럭 일주일이 되었을 때까지 물 한모금 안 마셨는데도 얼굴이 축나지 않고 눈
딱 감고 꼭 참선하는 사람모양 앉아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3주일이 되던 날 담당 의사를 불러 체중을 달고 건강진단
을 했는데 3주일 전에 달아 보던 체중이 변함 없이 그대로 있더라는 것입니다. 진맥을 해 봐도 그대로 있고 그래서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러냐고 물으니까 담당 의사말이 내가 알고 있는 의학지식으로서는 도저히 판단할 수가 없다는 겁니
다. 그래서 본인 보고 얼마나 더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나는 그것을 대답할 기력도 없지만 내 추측
으로는 이 제질 가지고 삼주일 동안 조금도 축나지 않았으니 앞으로 또 삼주일까지는 이렇게 더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이런 추측이 어떤 근거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하면서 굳은 표정으로 나가더라는 겁니다.
그 후 또 삼주일 동안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동상같이 앉았는데 마지막 삼주일째 되던날 그대로 쓰러져 버렸습니
다. 그러니까 육주일 사십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동포를 학살한 일본 경찰들, 그리고 자기를 유치장에 가둔
사람을 원망하고 간겁니다. 「고약한 놈들, 나쁜 놈들, 내가 뭐 잘못했다고.」 이렇게 원망하는 일념으로 차라리 내가
사형을 당하느니 네 스스로 깨끗이 이곳에서 죽자는 일념으로 지낸 겁니다. 처음 삼주일 동안은 날짜가 지나간다는 것
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담당자가 삼주일이 지났다는 얘기를 해 주어서 비로소 삼주일이 지나갔다는 인식을 했습니
다. 만일 이 때 주위 사람들이 이 사람에게 육주일이란 날짜를 인식시켜 주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보다 더 살아 있었
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의 꿈이 깨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꿈인 줄 몰라서
육체를 <나>라고 하기 때문에 공포증이 나고 분하고 억울하고 편하지를 못한 마음이 항상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시집을 가면 별수 있을까 하여 트집을 잡고 시집을 가 보지만 별수 없습니다. 첫날 저녁부터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시집을 가나 안 가나 일초도 마음 편할 시간은 없습니다. 잠이 들어도 편하지 못합니다. 홧김에 술이나 한 잔 먹자고
병으로 되로 들이 마셔도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술이 취하면 마음이 더 불안해 집니다. 취중에 진정하라고 술이 만
취돼 버리면 할 소리 안 할 소리 평소에 비밀로 간직해 놓았던 불평불만을 다 얘기해 버리게 됩니다. 나중에는 그 불
평을 털어 놓은 줄도 모르고 코 깨지고 소리치고 다 해 봤자 하나도 편하지를 않습니다. 본 마음을 잘 모르고 인생을
잘못 살아 가기 때문에 마음 속이 항상 편하지 못합니다. 아무 것도 모를 것 같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무의식
적으로 하게 됩니다.
미쳐서 옷을 훌렁 벗어버리고 나체가 된 채 길을 활보하는 미치광이를 더러 볼 수 있습니다. 혹은 요즘 히피족 모양으
로 옷에 옺갖 잉크를 다 바르고 살에도 바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의젓하게 다니는 광인도 있습니다. 이들은 쓰레
기통에서 썩은 고기 . 창자 . 닭 창자 이런 것을 줏어 먹습니다.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고 병도 안나고 또 석달 . 넉달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은 채 돌아 다닙니다. 평소에 십 배 백 배나 떠들면서 긂고 돌아다니지만 성한 사람보
다 기운이 몇 배 나 더 셉니다. 소위 미쳤다고 하는 그때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마음을 탁 놓았기 때문입니다.
처녀가 십년동안 열렬히 연애를 하다가 남자로부터 버림을 당해서 마음에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머리를 풀고 나서면
그때에는 세상에 아무 것도 쓸데없이 됩니다. 믿고 믿었었는데 그 자식 그런 줄 누가 알았느냐. 이젠 남자는 다 싫어
졌고 다시는 연애 안 하고 시집 같은 거 안 간다는 겁니다. 탁 놔 버리면서 하하 웃고 나서는 그때부터 자유입니다.
아무것도 근심 걱정이 없게 되는 겁니다. 또 미친 사람이 하는 말들은 대개 다 옳은 말만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
위 미쳤다고 하는 그때가 제일 건전한 상태입니다. 하고 싶은 말 그 자리에서 바로 다 하고 죽는 거 사는 거 걱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도 못 믿겠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
청년이 나를 괄시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총각만 보면 보기도 싫어집니다. 다 그놈이 그놈일거라는 생각이 들
어서 마음을 탁 놔 버리게 됩니다.
남자도 여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참 불쌍한 인간 현황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도 마음에 맞을 수 없고 믿을 사
람도 없습니다. 이 우주는 한 곳도 믿을 데도 없고 의지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모든 것을 단념하고 마음 탁 놓게 됩니
다.
그러니까 우리는 미치지 못해 가지고 어디에 구속되어 있는 셈입니다. 혹 행여나 싶어서 구속되어 견디어 보면 좀 나
아지려니 하고 날마다 해마다 속아서 나중에는 칠십 팔십된 후에 늙어서 죽게 됩니다.
여자는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시집 잘못 간 한탄이 굉장합니다. 이 문둥이 같은 인간한테 시집을 잘못 와서 내가
이 고생을 한다는 것입니다. 늙은 여자는 나중에 자식에 대한 원망이 큽니다. 자식한테 천대를 받고는 다 젊어 시집
잘못 간 것 후회합니다. 청춘 과부도 자식들 불쌍해서 돌보기 위해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어려운 고비도 다 참아 가며
남한테 천대 받아 가면서 시집 안 간 것인데 자식들은 이제 와서 어머니 고생한 것 만분의 일도 안 알아 줍니다. 그런
얘기를 하려 하면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럴 줄을 알았으면 벌써 시집이나 갈건데 괜히 청춘과부로 늙었다고 후
회가 되어 죽겠다는 겁니다.

꿈인 줄 몰라 철저한 원수로
이것은 여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하나 들면 청년 순경 한 사람이 후처를 잘못 얻
어 자식에게 못할 일을 한 비통한 얘기가 있습니다.
그 순경은 본래 자기 아버지가 새로 맞아들인 어머니한테 무서운 천대를 받았습니다. 밥도 안 먹이려 하고 옷도 안 입
히려 하고 학교도 보내지 않으려 했는데 겨우 아버지 덕으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자기 아버
지한테 갑니다. 자기 아버지도 순경이었으므로 학교에서 지서로 갔다가 저녁에 아버지하고 같이 집으로 갑니다. 그것
은 계모가 자꾸 때려주고 구박을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순경은 자기 아들을 가만히 쳐다보면 피를 토할 것 같은 심
정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새 마누라를 도로 가라고 하지는 못하겠고 자식한테 대하는걸 보면 당장 총살이라도 하
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부자가 함께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결심하기를,「나는 어린 자식을 두고 마누라 죽으면 절대 장가 안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
기도 불행하게 마누라가 일찍 죽었습니다. 젊은 몸으로 혼자 살 수는 없으니까 장가를 가고보니 그사람 아들이 자기
어렸을 때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또 순경이 되었는데 학교 안 가는 일요일에도 아버지 없이는 하도 구박을
하기 때문에 밥도 먹을 수 없고 집에 못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꼭 데리고 가서 옆에 앉혀 놓고 밥을 먹
는다는 겁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아침에 아들이 자기하고 밥먹고 나서 역시 낮에도 집으로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바람도 쐴일 겸 들로 나갔다가 그 아들이 어느 다리에 올라서서 기둥에 걸터 앉아 있게 되었는데,「네가 이렇
게 살면 무엇을 하느냐」는 생각이 든 아버지는 등뒤에서 총을 쐈습니다. 자기도 총을 쏴서 부자가 죽었다는 얘기입니
다.
꿈속의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인데 철저한 원수가 되어 가지고 내 생애 또 만나서 그 여자하고 아버지하고 아들하고는
서로 원수가 되어 너 때문에 내가 죽고 나 때문에 네가 죽고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중생 생활을 하다 보면 그 누구도
이러한 경우를 만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불법도 낮꿈 밤꿈 깨자는 것
마음을 깨쳐 자아완성을 하면 남자가 여자를 봐도 아무런 생각이 안 나고 남자를 봐도 아무 생각도 안 납니다. 이렇게
일 없는 한가한 사람이 되고 부처가 되어야 마음이 편하고 태산같이 든든해지고 우주가 나 자신이고 우주의 일이 전부
내 일입니다.
따라서 중생은 한이 없기 때문에 중생 하나하나를 다 따라다니며 타이르고 깨워 줘야하고 밥먹여 줘야 하고 옷입혀 줘
야 하고 이렇게 거들어 주면서 발심시켜 꿈을 깨도록 해 줘야겠습니다.
결국 부처님 사십구년 동안 설법하신 것도 꿈을 깨라는 말씀뿐입니다. 이제 꿈을 완전히 깨어서 꿈속의 의식을 깨고
잠재의식까지 깨워야 됩니다. 그러니까 의식이 통일되고 잠재의식이 통일되어야 하는데 잠재의식에도 계단이 있고 깊
이가 있습니다. 잠재의식이 칠할쯤 움직이는 것도 있고 또 좀더 들어가면 오할 움직이는 것, 또 깊이 더 들어가면 십
분의 오할 움직이는 것, 십분의 일할 움직이는 것, 그것도 만분의 일할 움직이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 모든 잠재의식이 다 정리되어지도록 공부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 공부는 먼저 공부한 선각자(先覺者)한테 의지해야
합니다. 공부를 해 보면 정말 재미 있습니다. 돈 모으는 것 보다 훨씬 더 재미납니다. 점점 마음과 정신이 밝아지고 깨
끗해지고 아무 근심걱정이 없고 해탈의 경지에 깊이 들어가게 되어 모든 것을 차차 다 알아지게 됩니다. 아까 강원도
여자가 밭에 점심을 가지고 가다가 도깨비한테 홀려 십오년 동안 잘 산 것처럼 확실히 그 여자는 꿈속에 애착을 가지
고 생시와 다름없이 십오년을 잘 산것인데 생시의 보름이 꿈속의 십오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이 도깨
비에게 홀린 격이지만 그래도 꿈 복이 있었기 때문에 아주 잘 사는 도깨비에게 시집을 가서 애기도 낳아 주고 호강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낮에는 낮꿈이 되어 있고 밤에는 밤꿈이 되어 있듯이 그 도깨비한테 홀려간 것도 사실은 도깨
비한테 홀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산골에서 호미로 밭을 매고 있는 것도 꿈이라는 점에서는 결국은 도깨비한테 홀린 것과 공통됩니다. 거기서도 도
깨비한테 홀려가지고 있는 것이고 지금 말하는 생전이라는 것도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기왕에 홀린 바에는 다시
한번 좋은데 홀려 가지고 그 당나귀 타고 다시 한번 더 가보면 좋겠다는 그 말은 무리가 아닙니다.
이 모두가 다 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꿈이고 저것도 꿈이고 또 현실이라면 이것도 현실이고 꿈도 역시 현실입니
다. 이렇게 모든 것이 똑같으니까 무시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깨닫고자 하는 이 마음이 전부 이렇게 만들어서 천당 꿈을 꾸어 보고 지옥 꿈을 꾸어 보고 중생 꿈을
꾸어 보고 남자 꿈 . 여자 꿈 . 아이 꿈 . 어른 꿈도 꾸어 보고 그런 중생놀음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제 마음 뜻하는
대로 선(善)이 아니면 악(惡), 악이 아니면 선, 선도 악도 아닌 멍청한 짓 중에 어느 짓을 하게 됩니다. 소위 수도(修
道)한다고 하는데도 멍청하게 선도 악도 아닌 무아지경에 들어섰다 하고 정신통일했다 하고 자기 마음을 깨우친다고
하지만 의식에서 망상을 내고 있거나 망상을 갈아 치라고 거부합니다. 또 망상을 그대로 두어도 안되고 망상을 떼어도
안 되는 것이며 성불한다는 생각도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통일하고 선정(禪定)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번뇌망상을 쉰다고 합니다. 번뇌망상을 쉬어 가지고 더욱 정밀
하고 깊은 선정에 들어가 오래 있으면 신통이 난다고 합니다.
실달태자가 마음을 깨쳐 석가여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육년 동안을 꼬빡 앉아 가지고 이렇게 선정을 닦았기 때문입니
다.
그래서 섣달 여드렛날 새벽에 별 뜨는 걸 보고 묘하게 깨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친 뒤에 보니 내가 실달태자
로 있을 적에 세상이 허무해서 싫다고 짜증을 내고 그랬는데 그 놈이 바로 그놈입니다. 실달태자가 한참 인간염증이
나서 「왜 늙어야 하고 병들고 죽어야하는가.」하고 생각하던 바로 그 마음을 깨친 것이며 깨치고 보니 바로 그놈이었
습니다. 그렇다고 생각을 깨친 것은 아니며 생각을 내는 마음을 깨친 것인데, 마음을 깨치면 깨친 그 마음으로 생각을
알고 세상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게 묘법이란 것입니다. 묘한 깨침이란 말입니다.
불법은 마음 깨치는 공부이므로 지식이나 학문하는 태도로 임해서는 석존의 깨달음을 몸소 자기 것으로 체득할 수 없
습니다. 스스로 그 경지에 도달해서 성불하기 전에는 불가능하며 이것은 오직 석가여래 한 분만이 우리에게 전해 준
소식입니다.
이제 마음을 깨치는 선법(禪法)에도 전문적으로 하는 달마선(達磨禪)과 천천히 닦아 익히는 의리선(義理禪)이 있습니
다. 달마선이란 <마음>을 곧 깨치는 선법으로소 고속으로 가는 방법이고 의리선은 과학적 . 철학적 . 이론적으로 따져
볼 것 다 따져 가며 닦는 방법입니다.
비유하면 여러 수억만 킬로의 거리를 올라가는데 제트기나 우주선 로켓 같은 것을 타고 가는 것이 달마선인데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다 위험한 것입니다. 인력거나 자동차나 우마차를 타고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 의리선인데 그러나 의리
선도 지도자 없이는 정말 위험합니다. 중간에 가다 보면 자꾸 주저앉게 되고 또 마음 세계의 과정을 모르고 잘못되면
허황된 또 다른 꿈속 세계에 뻐져서 잘못되기 때문입니다.

꿈과 같은 것이 아니라 꼭 꿈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모든 것이 너의 업으로 있다. 하나의 환상이고 몽환(夢幻: 꿈)이지 이것이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
다.」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여몽환(如夢幻)하니까 이 세상이 꿈과 같다, 이렇게만 해석을 하고 넘어가는
데 있습니다. <여몽환>이란 여(如)자가 비슷하다 같다는 뜻이 아니라 꼭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꼭 꿈이다, 참
꿈이다.」 그래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여여(如如)다 진여(眞如)다 그러는데 이때 여(如)자의 뜻은 「비슷하다 닮았다」
그런 뜻이 아니고 「꼭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이렇게 새깁니다. 그러면 <여몽환>(如夢幻)의 여(如)도 비슷하다는 뜻
이 아니라 <여여>하다 꼭 같다는 뜻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교 이대로가 정말 과학이고 물질세계의 그대로가
꿈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자연계 이대로가 꿈이라는 겁니다. 꿈이라는 게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고 요새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
는 유물사상 그것이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이것이 꿈이 줄 모르고 참선하는 이는 신도이거나 스님이
거나 간에 참선이 잘 안됩니다.
무언가 자기가 이 세상에 원한이 있다고 오인하게 되고 그 한이 가슴 속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을 원망한다든가 하게 되
어 아무리 참선을 해도 안됩니다. 어떤 여인이 첩 때문에 억울하게 남편을 뺏기고 아들딸과 집까지 뺏기고 입은 옷 그
대로 쫒겨난 여자가, 분하고 세상이 원망스러워서 비구니가 되었다고 하면 그 귀여운 자식들 생각이 눈에 선하고 남편
에 대한 원망이 마음 속에 가득차게 됩니다.
이것이 곧 업장(業障)인데 이 장애의 경계선이 가로막혀 절대로 안됩니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려면 우선 남을 사랑하
는 생각이나 미워하는 생각을 일체 다 버리기 전에는 절대 견성을 할 수 없습니다. 그걸 일단 떠났을 때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대로 발심을 한번 해 놓으면 됩니다. 어느 땐가는 선지식(善知識)만 만나 가지고 이런 법문 듣고 번뇌 망
상 탁 집어 내던질 기회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연이 되는 것인데, 만일 또 그렇더라도 이런 보통 사람은 마
음 속 깊이 남아 있는 집착을 잘 모릅니다. 말로는 「나는 집착 다 떼어 버려서 없다」고들 하지만 없기는 뭐가 없습
니까. 잠재의식 속에 꽉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업장이 잠재의식으로 남아 있어서 참선이 잘 안되거나 염불이 잘 안되고 다라니를 해도 일념(一
念)이 안될 때에는 참회를 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한테 절을 천배 만배 하고 참회를 하여 업장이 녹아 내려 가고 나
도 모르는 잠재의식이 뿌리채 뽑아져 버리기 전에는 참선도 견성도 아무것도 안됩니다. 그래서 옛날 스님들도 공부하
다 안되면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업장과 잠재의식을 완전히 참회하지 않고 참선하다가는 크게 잘못될 수가 많습니다. 참선을 열심히 해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며칠 안있으면 견성할 정도가 되었을 때 미쳐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공부하다 미친 사람은 완력도 광장하고 무서워서 갈 수도 없습니다. 벽이나 돌담 같은 것도 탁 치면 무너지는 정력이
나옵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마음을 쉬어가지고 약을 먹고 미친 병이 다 낳아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을 때 견성 직전쯤
가면 다시 미쳐 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다 그 사람의 중죄업장(重罪業障)이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다가 참선할 때 참
선한 큰 힘을 타고 나타난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공부가 되고 다른 망상은 뿌리가 뽑아졌는데
마지막 그놈만은 잠재의식 속에 있다가 참선을 하게 되면 참선과 싸웁니다.
우리가 참선할 때 졸음이 오면 화두(話頭 : 참선하는 마음을 이끌어 가는 과제)하고 잠싸움하는 것과 같습니다. 온 마
음하고 잠하고 싸우다가 지치면 화두가 졸음에 지듯이 나중에는 업장 그놈만 남아서 마음이 감당을 못하게 되면 미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업장이 지중한 사람은 업장하고 옥신각신 싸우다간 미치기 쉬우니, 이런 사람은 참선이나 다라니보다는 먼저
관세음보살님이나 지장보살님한테 기도해 가지고 업장이 다 없어지는 상서라도 있어서 꿈이거나 생시거나 이런 징조를
먼저 얻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금강경 산림을 마치신 분들은 모두 다 금강경의 정법을 신수봉행(信受奉行)하는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
이가 되시고 또한 더욱 많은 불자들이 나오도록 정법을 널리 펴시면 이 혼란한 사회가 바로잡히고 정말 살기 좋은 나
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모두 금강경 설법 듣는다고 너무 많이 애를 쓰셨습니다. 한번 죽죽 새겨서 읽는 정도로 하면 한 세 시
간 좀더 걸리면 되고 약간 설명을 해도 한 삼일이면 될 것인데, 이것을 삼주일이 넘어 사주일이나 되도록 지루하게 해
서 여러분이 큰 고역을 했습니다. 눈도 깜짝거리지 못하게 하고 땀이 바짝바짝 나게 했으니 아마 내가 죄가 많을 겁니
다.
원이차공덕(願以此功德) 원컨대 이 공덕
보급어일체(普及於一切) 온 누리에 두루하여
아등여중생(我等與衆生) 온 중생 우리와 함께
개공성불도(皆共成佛道) 모두 다 성불해지이다
나무석가모니불
應化非眞分 第三十二 끝.

금강경 강설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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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一體同觀分 第十八
須菩提야 於意云何오오 如來有肉眼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肉眼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天眼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天眼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
오 如來有慧眼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慧眼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
法眼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法眼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佛眼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有佛眼이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恒河中所有沙를 佛說是沙
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如來說是沙니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一恒河中所有沙히 有
如是沙等恒河하고 是諸恒河所有沙數로 佛世界-如是하면 寧爲多不아 甚多니이다 世尊하
佛告須菩提하사되 爾所國土中에 所有衆生의 若干種心을 如來悉知하나니 何以故오 如來說
諸心이 皆爲非心이요 是名爲心이니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過去心不可得이며 現在心不可得
이며 未來心不可得일새니라.

原文解釋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육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육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천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천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혜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혜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법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법안이 있아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불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불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항하에 있는 모래에 대해 부처님이 그 모래를 말한적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
존이시여, 여래께서 이 모래를 말씀하셨아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와 같은
수의 항하가 있고 이 모든 항하의 모래와 같은 수의 불세계가 있다면, 참으로 많다 하겠느냐.』 『매우 많사옵니다. 세
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세계 가운데 있는 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가 다 아
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고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니, 그것은 수보리야,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科解
부처님의 마음자리에서 보면 일체의 현상계가 다 곧 마음 하나이므로 마음과 객관을 떼어서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중생의 마음도 그 근본을 살펴보면 중생이 아니고 알고 보면 다 부처님의 마음과 같은 자리에서 나온 한마음의 일입니
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다섯가지 신통도 따지고 보면 마음 하나고 중생들의 온갖 번뇌 망상도 과거심 . 미래심 . 현재
심도 다 한가지 마음일 뿐이므로 하나로 봐야 한다는 뜻에서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이라 한 것입니다.

設義
참 마음은 볼 수 없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는 서양 철인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 같은데, 그러나
이것이 적어도 철인의 말이라면 심히 서글픈 일입니다. 생각은 어디까지나 주인공인 나로부터 창조되어진 2차적인 것
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고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은 마음의 본체는 아닙니다. 당나라 때 인도에서 스님 한
분이 오셨는데 이 분이 모르는 게 없어서 뭐든지 물으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일체중생의 마음을 다 알아맞히는 신통
을 얻은 이입니다. 이것을 다른 이의 마음을 안다고 타심통(他心通)이라고 합니다. 그때 남양혜충국사(南陽慧忠國師)라
고 육조 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조사님이 계실 때입니다. 이 어른이 국사로 계실 적에 그런 소문이 나서 인사를 하러
가셨습니다. 혜충국사 말씀이 「소문을 들으니 스님께서 타심통까지 하셔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잘 아신다는데 사실
그렇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럼 내 마음 좀 알아맞춰 보십시오, 자 그럼 내 마음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하
고 물었습니다. 이때 혜충국사는 강가에 배를 타고 놀던 일을 생각했습니다. 「국사님께서는 지금 아무 강가에서 뱃놀
이를 하십니다.」 혜충국사는 이번에는 다른 생각을 하며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 대선사님이시고 일국의
국사님이 어떻게 원숭이하고 같이 노십니까.」 그때 혜충국사는 창경원 같은데서 보던 원숭이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건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또 이번에는 다시 마음을 대 선정에 두시고는 「지금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
습니까.」하고 물으니 그는 알아 맞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혜충국사에게 귀의하여 정법(正法)을 닦았다는 말
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만 알아도 안 됩니다. 우리가 흔히 체니 용이니 하고 말하지만,
「아무 생각 없는 게 자기 근본성품이다. 이것을 발견해서 깨달아 가지고 나중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
인가 보다.」 그렇게 알고 있고 이 반야경도 그렇게 새겨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실제로 체득하신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일이 없다.」고 딱 잡아 떼시다가 「얻긴 얻었지만 참말로 얻은 건 아니다. 그게 무실무
허한 법이라 실로 얻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허무한 것도 아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내용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 또 하신 것입니다.

시간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흔히 「과거다 . 현재다 . 미래다 .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나 미래는 다 현재를 기준으로 해
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이 오후 6시라면 6시 1분뒤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니 미래의 시간이고 5시 59분까지
는 지나갔으니 과거라 하겠고, 그러면 5시 59분 1초부터 6시 0초까지는 현재가 되는데 그 1분을 60초로 나누어 생각
할 때 59분 30초가 현재라면 59분 29초는 과거고 59분 31초는 미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1초를 현재라고 하더라도
1초의 시간을 만분의 1초 백만분의 1초로 나누어 생각할 때는 그것도 현재라고 지적할만한 시간의 표준은 없어집니
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므로 흐름의 연속일 뿐 어느 순간도 정지되어 있는 순간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다만 시간이 흐르는 것을 우리가 육안으로 보지 못할 뿐입니다.
만일 시간이 흘러갈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의 물질이어야 합니다. 최소한 에너지라도 되어 가지고 흘러가야 할 것입니
다. 그렇지만 에너지나 물질을 가지고 시간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 물질의 운동을 가지고 시간이라고 하지는 않습
니다. 또 물질의 운동을 가지고 시간이라고 말하지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물체의 운동법칙이 각각 다
르기 때문입니다. 일치하는 표준이 없으면 같은 한 시간이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물질의 움직
임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으므로 어느 순간을 가리켜 현재라고 할만한 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는 있을 수 없다고 하면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과거나 미래는 성립될 수 없는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가정을 해서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진실 그대로를 말한다면 삼라만유의 모든 존재가 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것입니다. 물
질 그 자체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과거라고 하는 것은 지나간 일을 추
억한다는 말이지만 작년은 이미 작년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작년 삼백육십오일 다 흘러가 버린 것이므로 작년이라고
하는 사실은 다 소모되고 없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것을 현실이라고 할 것인가. 우리는 흔히 현실 현실하고 현실주의를 내 세우지만 우리들이 말하고 생
각하는 그 내용을 따지고 보면 사실 그런 현실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현실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있는 것만이 현실이지 지나가 버린 것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추억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어제
를 다시 만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어제라는 것은 생각뿐이지 어제란 확실한 시간이란 게 없습니다. 일초도 쉬지 않
고 돌아가는 시계바늘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한 시간이면 어김 없이 한 바퀴를 돕니다. 죽순(竹筍)이 밤 사이에
한 길을 크지만 크는 모습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죽순이 크는 속도나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속도가 최
고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어느정도의 속도는 볼 수 있지만 속도 이전의 움직임
을 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프로펠러가 처음 돌기 시작할 적에는 확실히 보이지만 빨리 돌면 차차 안 보이다가 나중에는 동그라미만 보이
게 됩니다. 우주 만물은 끊임 없이 성주괴공(成住壞空)이 되어가고 있으니 현실을 볼 수 없고 일 초라도 머물러 있는
순간이 없어서 과거나 미래를 가지고 생각하는것 뿐이므로 현실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그 본래의 형태는
없습니다. 보이지 않게 돌아가는 시계 바늘이 어떤 장소에 잠시도 머무르지 않듯이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자꾸 커가고
나중에는 없는 데로 자꾸 돌아가는 한 개의 과정을 보는 것이지 현실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볼 수 있는 현실
은 없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객관세계인 이 우주에는 현실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현
실이 절대존재가 아니라는 확실한 안목을 가지고 현실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염세철학(厭世哲學)이 되어서 「염세다. 우상이다. 무상이다.」하여 현실을 무시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
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있는 것으로 있는 줄로 잘못 알았기 때문에 중생들은 자꾸 속아서 고해의 길을 세세생생을 잘
못 살아 가게 마련인데, 이런 중생들로 하여금 이런 현실을 바로 살게 하며 속지 않게 해서 복과 지혜가 원만한 정토
(淨土)의 참다운 현실을 살게 하자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런 뜻에서 현실이란 무엇인가 하고 뚜렷하게 말하자면, 현실
이라 할 수도 없고 무엇이라 대답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덕산화상과 삼세심(三世心) 불가득
당나라 때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던 덕산(德山)스님이란 유명한 조사 스님이 계셨습니다. 별명을 주금강(周金剛)이라
고 했는데, 금강경에 대해 하도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당시 금강경에 대해 하도 잘 알기 때문에 그
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당시 금강경에 대해 공부한 이들은 모두 제나름대로 주석해 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간단하면서
뜻이 한량없이 깊기도 하므로 불법 전체의 대의를 금강경에서 끄집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지간하면 여기에
붓대를 듭니다. 그래서 팔백대가(八百大家)나 되는 많은 이들이 금강경 주석을 해 놓았는데 주금강도 자신이 직접 주
석하여 짊어지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남방에 육신보살(肉身菩薩)이 한 분 나왔는데 일짜무식한 나무꾼으로 견성을 해서 그 종지가 크게 떨친
다는 소문을 들은 주금강은, 「여러 백천만겁 아승지겁을 닦아서 구공을 얻고 보살행을 해야 한다고 일체 경전에 쓰여
있는데 땔나무꾼이 견성을 하다니 그리고 또 쉽게 성불한다고 하니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어디서 마구니가 왔는가
보다. 내가 한 번 가봐야겠다.」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팔백여가를 집대성하고 자기가 쓴 것이 제일 완전하게
됐다고 하여 항상 「금강경은 나한테 물어라.」하며 돌아 다니는 판인데, 육조대사가 나와서 이런 요망한 소리를 하여
부처님 뜻에 어긋나는 내용을 가지고 수 많은 제자가 있다니 이들한테 항복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짊어지고 남방 양양 밑에 광동(廣東)으로 수만리 길을 걸어가는 중이었습니다. 한참 가다가 한 노파
가 길가에서 호떡을 팔고 있는 집을 보고 「점심을 좀 먹어야 겠으니 호떡 좀 팔으시오.」했습니다. 그 노파 말이
「호떡은 팔기가 어렵지 않은데 스님 짊어진게 무엇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이것이 금강경입니다.」 「금강경에 대
해서 내가 의심나는 게 있는데 물어 보면 대답할 수 있습니까.」 「아 금강경이라면 다 잘 알고있으니 무엇이나 물으
시오.」 「금강경에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있습니다.」
「그걸 좀 설명해 주십시오.」 그래서 지금 내가 설명한 것처럼 우리 모두 삼세심 뿐인데 이름이 삼세심이지 과거심
미래심 뿐입니다. 그러니 삼세심이 불가득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듣고 있던 노파가 묻기를,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삼세심이 불가득인데 점심이라 하셨으니 어느 마음에 점심을
합니까.」하고 추궁합니다. 점심이란 배고프다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마음에 점을 찍는다. 잠깐 요기한다는 말인데,
그러니 어느 마음에다 점을 칠 것이냐는 뜻입니다. 이 물음에 금강경 대강주(大講主)인 주금강의 입이 탁 틀어막혔습
니다. 과거심에다 점을 칠겁니까. 현재심에다 점을 칠겁니까. 말도 실수고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불교라면 자
기 혼자 하는 판인데 그야말로 무식한 호떡장수 할머니에게 꼼짝 못하게 됐습니다. 호되게 방망이를 맞은 주금강은 태
도를 고치어 「이 근방에 어디 선지식이 계신 절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들어가면 용담선사
(龍潭禪師)라고 아주 큰 선지식이 있습니다.」하고 가리켜 줍니다.
그래서 자못 심각해져 가지고 거길 들어가서 여러가지 얘기 많이 하고 금강경 펴 놓고 그 얘기를 저물도록 하다가 어
두워서 자기가 잘 방으로 가려고 하는데 용담스님이 등불을 하나 켜 줬습니다. 덕산스님은 고맙게 받아서 들고 문을
열고 막 나가려고 하는 찰라에 용담선사가 등이 깨지도록 쳐서 불을 홱 껏습니다. 그 바람에 덕산스님은 확철대오해서
그 이튿날로 자기의 손수 쓴 금강경주석을 뒷산에 올라가서 다 불질러 버렸습니다. 「내가 큰 죄를 지을 뻔했다.」고
그러면서 문자법사니까 글을 잘 새기고 불법종취(佛法宗趣)가 이렇다 하는 정도지 견성한 이가 아닙니다. 실상반야 없
이 문자반야란 말입니다. 문자반야도 그대로 잘하면 문자견성(文字見性)으로 그 조리를 잘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껍데
기만 해석하는데는 잘 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견성하면 그렇다 하더라, 부처가 되니까 이렇다 하더라」하는 정
도였지 실제로 자신이 깨달아 보지는 못했는데 이제 참 깨치고 보니 참 굉장한 이가 됐습니다.
그래서 그때 선방에 가면 선지식 같은 이가 혹 견성을 했다거나 뭣좀 아는 것같이 하는 학인이 있으면 이것을 물어 봅
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덕산스님이 그 노인한테 호떡을 얻어 먹었겠느냐.」는 겁니다. 과거심불가득 . 현재심불가득
. 미래심불가득이고 모두 불가득인데 어느 마음에다 점을 칠 것이냐. 그걸 대답하면 내가 떡을 거져 드리고 그걸 대답
못하면 떡을 안 준다는 그 노파의 말을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를 시험합니다. 인제 어떻게 해야 떡을 얻어 먹겠느
냐는 겁니다. 여기 꼼짝 못하고 떡을 내 주는 법이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 숙제가 하나 더 붙었습니다.
一體同觀分 第十八 끝.

原文
法界通化分 第十九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若有人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로써 以用布施하면 是人이 以是因緣으
로 得福多不아 如是니이다 世尊하 此人이 以是因緣으로 得福甚多니이다 須菩提야 若福德
이 有實인댄 如來不說得福德多니 以福德이 無故로 如來說得福德多니라.

原文解釋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
로 해서 받는 복이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얻는 복이 매우
많사옵니다.』 『수보리야, 만일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아니할 것인데 복
덕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여래가 복덕이 많다 말 하느니라.』

科解
칠보를 보시한 인연으로 받는 복덕은 인간세상이나 천상에서 받는 유위적인 복을 말하며, 이에 대해 함이 없는 절대의
복덕은 범부와 성인을 초월하는 통화의 공을 말한다. 그러나 유위(有爲)의 상대적인 복이라 하여 그것을 버리면 공행
(功行)을 이루지 못하고 무위법이 비록 참되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에 기대려 하면 성과(聖果)는 증득할 수 없다. 그러
니 기대지도 말고 버리지도 않는 보살만행이라야 이것이 구경의 진리이고 성불하는 법이 된다.
그러므로 이 법은 현상계와 본체계를 다 통하는 통화의 공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이라 했다.
(청담스님의 설법이 누락되어 종경(宗鏡)선사의 제강(提綱) 중에서 추림)

設義
없음.
法界通化分 第十九 끝.

原文
離色離相分 第二十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佛을 可以具足色身으로 見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如來를 不應以具
足色身으로 見이니이다 何以故오 如來說具足色身이 卽非具足色身이요 是名具足色身이니
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를 可以具足諸相으로 見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如來를
不應以具足諸相으로 見이니 何以故오 如來說諸相具足은 卽非具足이니 是名諸相具足이니
이다.

原文解釋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를 구족한 육신으로 볼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구족한 육
신으로 볼 수 없사옵니다. 왜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구족한 육신이 곧 구족한 육신이 아니라, 이름이 구족
한 육신이기 때문이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구족한 몸매로 볼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
존이시여, 여래를 구족한 몸매로 볼 수 없사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몸매의 구족은 곧 구족
이 아니옵고 그 이름이 몸매의 구족이기 때문이옵니다.』

科解
모든 부처님은 다 무위법을 증득했기 때문에 부처라 하는 것이고 상호를 성취했기 때문에 부처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거울이 아무런 티도 없어서 모든 물건을 비칠 수 있는 이치와 같이 여래의 법신은 필경은 육신이 아닌 것
이며 따라서 상호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상호 두가지가 부처 아닌 것도 아니어서 법신을 여읜
것도 아니므로 여래는 색신이 아니라 법신이란 뜻으로 「색신이 아니라」했고 또한 색상이 없는 것도 아니므로 『이름
을 구족할 색신 . 구족할 제상이라 한다』고 하셨던 것이니 색상을 여읜 법신의 여래를 말씀한 대문이란 뜻으로 이색
이상분(離色離相分)인 것입니다.

設義
없음.
離色離相分 第二十 끝.

原文
非說所說分 第二十一
須菩提야 汝勿謂如來作是念하되 我當有所說法이니 莫作是念하라 何以故오 若人이 言하되
如來有所說法이라하면 卽爲謗佛이니 不能解我所說故니라 須菩提야 說法者는 無法可說이
是名說法이니라 爾時에 慧命須菩提白佛言하되 世尊하 頗有衆生이 於未來世에 聞說是法하
고 生信心不이까 佛言須菩提야 彼非衆生이며 非不衆生이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衆生衆生
者는 如來說非衆生일새 是名衆生이니라.

原文解釋
『수보리야, 너는 말하지 말라 여래가 「내가 설명한 바 법이 있다고 생각하리라」는 이런 생각 내지 말라. 왜냐 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설명한 바 법이 있다」고 하면 곧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고, 나의 말한 바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법을 말한다는 것은 법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설법이라 이름
하느니라.』 그때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이 이 다음 세상에 이런 법문을 듣
고 믿는 마음을 내는 이가 있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중생이다 중생이다 하지만 여래는 중생
이 아닌 것을 중생이라 이름하여 말하느니라.』
科解
여래는 육신으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모양으로 볼 수 없고 여래의 법은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는 법입니다.
이렇게 말이 아니고 설명할 법도 없는 것인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거짓으로 가정을 해서 법을 설하시어 팔만 사천
법문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 설법은 설법하시는 주체인 부처님도 공하고 설하는 내용인 법 자체도 또한 공한 것이니
설법하는 말씀의 실체가 또한 공한 것이고 내지는 설법의 대상인 중생도 역시 공의 도리로 이끌어 오기 위한 대상이어
서 부처님의 설법은 종일 말씀하셔도 한 말씀도 하신 것이 아니며 사십구년 설하신 것이 한 마디의 설법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 설할 것도 없는 공한 자리에만 주저 앉아서 중생제도도 안 하고 설법도 안 하면 소승이고 역시 집착입니
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한 마디의 설법도 없는 자리에서 큰 자비심으로 말이 아닌 말로 설법하신다는 뜻으로 비설소설
분(非說所說分)이라 한 것입니다.

設義
없음.
非說所說分 第二十一 끝.

原文
無法可得分 第二十二
須菩提-白佛言하되 世尊하 佛이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爲無所得耶(이까 佛言하사대
如是如是니라 須菩提야 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乃至無有小法可得이니 是名我 多羅三
藐三菩提니라.

原文解釋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어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것은 얻은 것이 없는 것이옵니
까.” 부처님게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내지 조그마한 법도 얻은 것이
없으니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하느니라.”

科解
마음의 본성은 지옥 갔을 때나 천당 갔을 때나 변한 것이 없고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부처인 때나 중생인 때나 그 근
본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므로 깨달은 것도 아니고 얻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닦아서 증득하고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는가. 그것은 얻은 것이 있고 아는 것이 있던 것을 다 없애어서 아무것도 얻음이 없는 경지에 이
르는 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그래서 무법가득분이라 한 것입니다.

設義
없음.
無法可得分 第二十二 끝.

原文
淨心行善分 第二十三
復次須菩提야 是法이 平等하야 無有高下하니 是名我 多羅三藐三菩提니 以無我無人無衆生
無壽者로 修一切善法하면 卽得我 多羅三藐三菩提하리니 須菩提야 所言善法者는 如來-說
卽非善法을 是名善法이니라.

原文解釋
『또 수보리야, 이 법이 평등해서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 하느니라.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중생살이>도 없고 <오래산다>는 생각도 없이 온갖 착한 법을 닦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착한 법이라 함은 여래가 곧 착한 법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이것이 이름이 착한 법이니라.』

科解
이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은 깨끗한 마음으로 일체의 선을 행한다는 뜻이지만 제 이십이분의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에서 말씀하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뜻을 계속해서 설명해 주시는 뜻이 됩니다. 앞 장에서 내지 아주 작은 법도 얻은
것 없는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먁삼보리라 하셨는데, 이 법이 평등해서 고하가 없다고 하십니다. 또 이 아뇩다라삼먁삼
보리는 아무 생각 없이 무심하게 깨끗한 마음으로 선법을 닦아라, 거룩한 보살행을 해라. 그러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를 얻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따라서 조건이 남아있고,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붙어 있는 마음으로 깨끗하지
못한 마음으로는 아무리 선행을 해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얻지 못한다는 뜻으로 <정심행선분>이라 했습니다.

設義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없이 일체의 선법을 닦으라.(以無我無人 無衆生 無壽者 修一切善法)」는 말은 곧 아
무 생각 없이 응무소주해서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하라는 뜻인데, 이런 대승사상은 소승경전(小乘經典)에는 안
나옵니다. 무슨 생각이든지 까딱하면 이것이 다 망상이고 중생놀음이니 시방제불한테도 속지 않고 귀신도 이 사람 볼
수 없고 제불도 이 사람 마음 찾아 볼 수 없는 구공(俱空)의 자리에 들어간 것을 <응무소주>라 합니다. 중생들의 탐진
치(貪瞋痴)도 없고 대보리를 증득하고 성불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어서 해탈도를 닦을 것도 없고 생사를 윤회하는 것도
아니어서 생사열반을 다 초월한 자리입니다. 생사는 유심(有心)이고 망상이며 열반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없는 것도
없는 것, 그것이 구공입니다. 앞뒤가 끊어지고 시간공간이 없어진 절대자유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사람이 여기에 낙착(落着)해서 떨어지면 그것이 바로 소승입니다. 생사열반이 없는 이 자리에서 열
반이 생사고 생사가 열반이며 생사도 열반도 아닌 이 자리에서 일체에 걸림이 없이 중생을 제도해야 합니다. 아무 생
각 없이 일하면 스믈 네시간 하루종일 일해도 피로도 모르고 잘 됩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 피로하고 능률이 오르지 않습니다. 설사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하더라도 그 기쁜 생각도 오래 못갑니다. 기쁜 생각
뒤에는 반드시 싫어하는 마음이 꼭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악한 마음으로 하는 일은 물론 나쁘지만 선심으로
하는 일도 오래 못갑니다. 선악심을 초월해서 오직 농사짓고 장사할 뿐입니다. 이것을 꼭 내가 먹을 것이란 생각도, 남
만 먹을 것이란 생각도 없이 그저 부지런히 일해서 누구던지 배고픈 사람이 먼저 먹을 양식만 준비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부지런히 합니다. 이것이 보살행이고 대자대비이니 이것이 소승네의 열반과 다르고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라는 절대적인 방법이 아
니고 강을 건너가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힐 수 없이 타는 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내용이 있
는 것도 아닙니다. 내용이 있다면 제망중중(帝網重重)의 내용이니,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절대적으로
있는 것이고 절대적으로 없는 것이고 하여 이걸 무어라고 할 수 없어서 결국은 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고 저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탐진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사생육도
(四生六道)를 갖춘 것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어서 일체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그런 것을 중생이라 했고, 그러므로 여래
께서 선법(善法)이라 하신 것도 선법이 아닌데 그런 것을 이름하여 선법이라 한 것입니다.
淨心行善分 第二十三 끝.

原文
福智無比分 第二十四
須菩提야 若三千大天世界中에 所有諸須彌山王의 如是等七寶聚를 有人이 持用布施라도 若
人이 以此般若波羅蜜經으로 乃至四句偈等을 受持讀誦하야 爲他人說하면 於前福德으론 百
分에 不及一하며 百千萬億分乃至算數譬喩로도 所不能及이니라.

原文解釋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수미산왕만한 칠보의 덩어리로 보시해도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에서 네 글귀의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고 남을 위해 설명해 주었다면, 앞의 복덕으로는 백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온갖 산수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느니라.』
科解
물질을 가지고 보시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그 육신을 구제하는 것에 불과하고 금강반야의 구경법(究竟法)으로 사
람을 구제하는 것은 대해탈(大解脫)을 성취하고 부처를 이루게 하는 것이므로 그 공덕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깨쳐서 보리를 증득(證得)하면 삼천대천세계의 칠보(七寶)덩어리가 아니라 온 우주의 몇 억만곱을 더한 것과 비
교하더라도 견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設義
없음.
福智無比昐僨 第二十四 끝.

原文
化無所化分 第二十五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汝等은 勿謂如來-作是念하되 我當度衆生이라하라 須菩提야 莫作是
念이니 何以故오 實無有衆生하야 如來度者니 若有衆生하야 如來度者면 如來卽我人衆生壽
者니라 須菩提야 如來說有我者는 卽非有我어늘 而凡夫之人이 以爲有我하니라 須菩提야
凡夫者도 如來說卽非凡夫요 是名凡夫이니라.

原文解釋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여래가 생각하기를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하리라.」한다고 말하지 말라.
수보리야,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실로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중생이 있어서 여래가
제도하였다면 여래는 곧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중생살이라는 생각>. <오래산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니
라. 수보리야, 여래가 <나라는 생각>이 있다 함은 곧 <나라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닌데 범부들이 <나라는 생각>이
있다고 함이니라. 수보리야, 범부라는 것도 여래는 곧 범부가 아니라고 말하나니 이름을 범부라 하느니라.』

科解
일체 중생이 본래 성불이어서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이 없으시며 오직 평등한 성품, 자타가 없는 진여의 법
계 속에 계시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곧 마음 속에 교화받을
중생이 있고 교화한 내가 있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주객 . 자타 우열의 차별세계에 떨어지는 것이므로 이런 것은 다
부처님의 경계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무량중생을 제도하시지만 제도한 것이 아니며 교화의 주체
도 제도된 중생도 없다」는 뜻으로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이라 했다.

設義
없음.
化無所化分 第二十五 끝.

原文
法身非相分 第二十六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不아 須菩提言하되 如是如是니이다 以三十
二相으로 觀如來니이다 佛이 言하사대 須菩提야 若三十二相으로 觀如來者면 轉輪聖王도
卽是如來로다 須菩提-白佛言하되 世尊하 如我解佛所說義컨댄 不應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
니이다 爾時에 世尊이 而說偈言하사대 若以色見我거나 以音聲求我하면 是人은 行邪道라
不能見如來니라.

原文解釋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가히 서른 두가지 상으로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그러하
옵니다. 서른 두가지 상으로서 여래를 뵐 수 있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만일 서른 두 가지 상
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 하겠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
서 말씀하시는 뜻을 제가 아옵기로는 서른 두가지 상으로써 여래를 뵐 수 없사옵니다.』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만일 모양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는 이는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니 여래를 볼 수 없으
리.』

科解
제26분에서는 법신(法身)은 거룩한 상, 즉 복상(福相)이 아니라는 도리를 말씀하시는 대문입니다. 우리의 참 마음이 곧
여래의 법신인데 이 참 마음자리는 선이니 악이니 복이니 죄니 하는 차별상이 떨어진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복을 지으
면 복된 상을 받고 죄를 지으면 추한 세상에 나쁜 모습으로 태어나서 화를 받는데, 그러나 설사 아무리 복을 많이 짓
고 아무리 거룩한 선행을 많이 해서 32상 . 80종호를 타고났다 하더라도 그 상만을 보고 여래를 식별한다는 것은 곧
현상계에 떨어진 것이고 생각 . 지식 . 망상에 집착된 중생경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색 . 성 . 향 . 미 . 촉 . 법(色聲香味觸法)으로 여래를 찾으면 곧 사도를 하는 것이 된다.』고 말
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상도 아니고 생각도 아닌 무상무위(無相無爲)에 열반적정에 가만히 앉아서 복도 짓지
말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設義
전에 한 수좌(首座)가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를 하는데 「무 ! 무 !」하고 소리내어 외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화두
의 뜻은 이렇습니다. 부처님께서 「온갖 것이 다 불성(불성)이 있다」(有情無情 皆有佛性)고 하셨는데, 조주(趙州)스님
이라고 옛날 중국에서 유명한 선지식에게 어떤 학인(學人)이 찾아와서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을 적에
<무>(無)하고 없다고 하셨으니 「도대체 무슨 뜻으로 <무>라고 하셨을까.」하는 화두입니다. 그런데 이 수좌는 「무!
무!」하고 소리를 내지 않으면 자꾸 다른 생각이 나기 때문에 어떤 때는 큰 소리 까지 내어서 「무! 무!」합니다. 그러
니 마지막에는 옆사람 참선에 방해가 되므로 쫒겨나게 됩니다. 할 수 없이 수좌는 걸망을 지고 이 절 저 절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나무 꼭대기에 올라 앉아서 혼자 참선을 하는데 밑은 깊고 험한 낭떠러지어서 떨어지면 즉사(卽死)하게 될
그런 데 올라 앉아서 마음 놓고 「무! 무!」하며 참선을 합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결국은 견성까지 한 일이 있었습
니다. 애를 쓰면 이런 정도로 애를 써야 합니다.
이 사람이 본래는 조그만 보따리장사였는데 만공스님 회상에 와서 법문을 듣고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위대한 것이라면
생명을 걸고 한번 해 봐야겠다고 발심을 해서 깨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무,무」하고 소리를 내어 음성으
로 부처를 구한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이 사람은 모양이나 말을 따라 부처를 구한 것은 아닙니다. 아둔해서 처음에
그랬지만 마음의 부처를 찾으려 한 수좌입니다.
이렇게 견성을 해서 마음을 깨쳐 놓으면 32상을 갖추신 부처님이 온갖 신통을 하시며 종로에 나타나셨다 하더라도 그
래서 서울의 온 시민이 다 나와서 마중을 하시더라도 이 정도 된 사람은 왼눈 한 깜짝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 깨친 자
리에서 보면 그런 부처님도 다 도깨비인데 거기 무엇하러 갑니까. 이와 같이 근본 문제를 해결해 놓아야 부처님께서
고맙게 여기시지 떡을 갖다 놓고 절을 하고 돈을 바치고 복을 많이 달라고 그래 봐야 불보살님은 고맙게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불보살님이 보인다고 기도하다가 도통했다고 하고, 참선하다가 일어나서 절을 하고 하면 이런 사람은 다 헛
공부한 것이고 삿된 공부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제일 수제자(首弟子)인 가섭존자께서 본래 명문대가(名門大家)의 부자집 아들이고 대학자 큰 인격자로
늦게 출가하신 분인데, 한번은 부처님께서 먼 데 어디 가셔서 설법해 주시고 한 달쯤이고 얼마쯤 계시다가 돌아오시게
되었는데, 그러면 대중들이 환희에 넘쳐서 모두 마중을 나갑니다. 그런데 가섭존자는 부처님 마중도 안 나가고 그대로
앉아 계십니다. 그러니 대중들이 한결같이 지탄을 합니다. 「가섭존자라는 이는 법도 모르고 어떻게 된 사람이냐.」하
면서 대중들의 여론이 분분하게 됐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너희들이 그런 불
평을 하는 것은 다 법을 발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여래를 환영한다는 것은 도깨비가 도깨비를 환영하는 것에 불
과하다. 가섭은 여래를 정말 존경할 줄도 알고 참으로 환영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존자를 이렇게 칭찬해 주셨고,
시방제불이 석가여래의 상수(上首)인 가섭존자 참 거룩하다고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또 가섭존자께서는 이런 도
리를 아시고 마중도 하시고 존경도 하시고 하니 거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도리를 알고 참선도 하고 경도 보
고 염불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이것이 잘못 되어 염불도 안 하고 기도도 필요 없고 경도 참선도 할 것 없다고 하면 이
것이 탈입니다.
法身非相分 第二十六 끝.

原文
無斷無滅分 第二十七
須菩提야 汝若作是念하되 如來-不以具足相故로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면 須菩提야 莫作是
念하라 如來不以具足相故로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須菩提야 汝若作是念하되 發阿耨
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說諸法斷滅가 莫作是念이니 何以故오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於法이 不說斷滅相이니라.

原文解釋
『수보리야, 네가 만일 생각하기를, 「여래는 구족상을 쓰지 않음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도다.」하겠느냐,
그런생각을 하지 말라. 「여래가 구족상을 쓰지 않음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지 말라』 『수보리
야, 네가 만일 생각하기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모든 법이 단멸하는 것으로 말하는구나.」한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 그러냐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모든 법에 대해 단멸상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니
라.』

科解
앞에서 제二十六 법신은 상이 아니란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을 말씀하실적에 여래는 32상 . 80종호(種好)로 볼 수 없
다고 하셨고, 또한 모양이나 소리로 부처님을 찾는다면 이것은 곧 사도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은
32상 . 80종호 같은 복된 상에는 아무 생각도 없고 일체의 법에 대해서 모든 진리는 아주 다 없어지는 것이란 단멸상
(斷滅相)을 가지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얻으시는 것인가 보다.」하고 잘못 생각할까 보아 염려해서 이 잘
못된 생각을 미리 막으시려는 말씀입니다.

設義
없음.
無斷無滅分 第二十七 끝.

原文
不受不貪分 第二十八
須菩提야 若菩薩이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로 持用布施하고 若復有人이 知一切法無我하야
得成於忍하면 此菩薩이 勝前菩薩의 所得功德이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以諸菩薩은 不受福
德故니라 須菩提白佛言하사대 世尊하 云何菩薩이 不受福德이니잇고 須菩提야 菩薩의 所
作福德은 不應貪着이니 是故로 說不受福德이니라.

原文解釋
『수보리야, 보살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보시했더라도, 만일 또 다른 사람이 일체
법에 내가 없음을 알아서 참다운 진리를 이루어 얻었다면, 이 보살이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더 뛰어나리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모든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셨다. 『세존이
시여, 어떤 것이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 것이옵니까.』 『수보리야, 보살이 복덕을 짓는 것은 탐착해서가 아니니 그
러므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느니라.』

科解
불수불탐(不受不貪)이란 주관 . 객관을 초월하여 선악을 여윈 자리에는 화복을 받는 주체도 객관도 없으며 미추호오(美
醜好惡)가 붙을 수 없으므로 탐착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 속에 나와 남이 있고 부처와 중생이 남아 있는 한 아
무리 물질적인 복덕을 많이 짓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대적인 인과이므로 한계가 있고 생명이 있는 생사법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없는 <참 나>의 자리, 상에 머므르지 않는 <응무소주>의 마음자리를 깨달아서 체득해야만
참다운 큰 복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의 말씀처럼 상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고 만
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상에 머무름 없이 아무 조건 없이 남을 위해서 장사도 하고 농사도 하고 보시 . 지계 . 인욕을 하는 보살의 무심한 자
리에 탐착이 있을 수 없고 복덕도 받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없으니 밥이 필요 없고 옷이 필요 없으며 돈 .
생명까지 다 떨어진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設義
부처님께서 어느 두 보살의 과거세의 역사를 말씀하셨는데, 그야말로 <일체법무아>의 법인을 체득해서 볼수복덕(不受
福德)의 무량복을 짓는 내용입니다.
이 보살이 어느 부처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태어나서 정법(正法)을 심어 주기 위해 사법(邪法)과 싸우게 됐습니다.
그때도 지금 우리 한국과 같이 정법이 사법에 몰리는 말세였습니다. 석가세존불법에는 정법(正法) 천 년, 상법(像法)
천 년, 말법(末法) 만 년인데 현재 불멸기원(佛滅紀元) 이천오백년이 세계통일년대이므로 말법의 운수는 아직도 구천
오백년이 남아 있고 지금은 말법의 초기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지금 우리 한국보다도 더한 말법시대가 되어서 비그승
들이 전부 장가가고 술 고기먹고 다 가짜중 썩은 중들만 있고 정말 수행을 하는 참 비구는 이 보살 한 분만 남았습니
다. 불교 신도도 말이 불자지 전부 마구니 신도고 그럴 때입니다. 그래서 술 . 담배 먹고 곰탕 . 불고기 먹어가며 참선
도 하고 기도를 해야 속히 견성성불한다는 것입니다. 하루저녁에 열 여자하고 자더라도 생각이 있으면 안되지만 아무
생각 안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가 엉망으로 되어 마구니떼로 변해가고 있으니 이 보살은 피눈물을 흘리며
원력을 세우고 정진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세밀한 계획을 잘 세워서 서울 같으면 먼저 파고다공원에서 법문을 한번 하고 다음에는 장충공원에서 한 번하
고 역전에서, 시청 앞에서 이렇게 돌아가며 설법을 합니다. 청중들 가운데 신심이 있는 신도도 있고 불교를 연구하는
지식층 인사도 끼여서 들어보고는 「이제야 정말 참 불법 바로 하는 스님 한 분 우리가 만났다. 이 대사님을 옹호해
가지고 정법을 펴자.」 이렇게 하여 모여든 대중이 몇 만명이 됐습니다.
그러니 그 반다면에 있는 삿된 무리들이 우리 한국같으면 만신 . 무당 . 불법을 삿되게하는 불교인들, 막행막식주의(莫
行莫食主義)로 하는 불교인 천주교 . 기독교 . 천도교 . 유교등 이런 것도 모두 삿되게 하는 무리들이 원체 많은데 전
부 단결해 가지고 일거에 대항해 옵니다. 그 스님이 공부도 대단하고 원력도 커서 목숨을 돌보지 않는데다 그 교세가
일취월장(日就月將)으로 팽창돼 가고 있으며 자기네 신도들을 다 빼앗기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컨데 저쪽에는 몇 백만명이 되고 이쪽은 몇 십만 되는 많은 신도들이 도처에서 생명을 걸고 싸움질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정법의 신도들이 다 죽어 갑니다. 이때에 마침 그 나라 국왕은 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있었으며 과거세부터 불법을 많이 공부했던 인연이 있는 이어서 경을 바로 보는 안목(眼目)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중들을 소집해 가지고 「이제 정법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이렇게 혼란한 것도 다 불교가
이렇게 혼란한 때문이다. 이제 다행히 옳은 스님이 한 분 나오셨는데 무자비한 사도들에게 목숨을 잃을 직전에 있으니
다 같이 가서 구하자.」고 호소했으나 군중들은 그릇된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국왕의 호소에도 잘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그 나라의 당시 국법으로도 도와 줄 수 없고 국회 같은 회의나 조정대신들도 다 반대했으므로
국왕은 할 수 없이 자기의 직속 호위병들 정도만 이끌고 그 스님을 보호하기로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 쪽이 원체 수가
많아서 이 쪽은 다 몰살당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러자 스님을 한 가운데 두고 둘러싸서 모셔 놓고 「우리는 다 죽더
라도 이 스님만은 살려야 한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국왕도 왕위를 걸고 헌신적으로 나섰지만 이 쪽은 자꾸만 밀리
고 무너져서 이대로는 그 스님을 보호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국왕은 속임수로 진을 하나 더 만들어 놓고 「우리
는 다 죽어도 좋지만 스님 한 분만은 꼭 사셔야 합니다. 어서 피해서 누더기옷이라도 입고 살아 계셔야만 저 마구니들
이 이 나라를 다 점령하더라도 스님께서 이 나라에 생존해 계신 한 그만한 덕이 될 것입니다.」하며 피하도록 했습니
다. 스님도 할 수 없이 그 길로 산으로 피해 가서 변형(變形)을 하고 공부만 하면서 기회를 보았으나 인연이 맞지 않
아서 그대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나라 국왕도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두 보살의 과거의
보살행을 이렇게 설명하셨는데, 열반경(涅槃經) 같은 데도 보살이 과거에 어떤 나라의 국왕으로 있었다는 등의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이런 보살님들의 다생겁래의 모든 행은 다 자기의 복덕이나 자기의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며 아무 생각 없이
무심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도할양무심의 행이기 때문에 탐착이 아니며 복덕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不受不貪分 第二十八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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